한국의 명시

김용택님의 詩

eorks 2007. 4. 18. 08:30
섬진강

김용택님의

    1.<섬진강·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2.<사 랑>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어 몹시 괴로운 날들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아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들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의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세상은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 하나가 다 이뻐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의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 3.<참 좋은 당신>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 4.<바 람 > 며칠을 바람찾아 돌아다녔습니다 저물 때 저물어서 고개 숙여 어둑어둑 걷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스물은 슬픈 것 같습니다 걸을수록 슬픔은 무거워 몸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슬픔이 무거워 어둠에 머리 기대고 핀 하얀 들꽃들을 만났습니다 정든 땅 언덕 위 초가 토방에 앉아 해 걷힌 눈을 마당에 깔았습니다 -------------------------------- 5.<가 을>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 6.<가을에 읽는 시>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 7.<그대 생의 솔숲에서>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 8.<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 9.<나비는 청산 가네>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섰네 내 맘에 한번 핀꽃은 생전에 지지 않는 줄을 내 어찌 몰랐을까 우수수수 내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사랑에서 돌아선 그대 눈물인 줄만 알았지 내 눈물인 줄은 내 어찌 몰랐을까 날 저무는 강물에 훨훨 날아드는 것이 꽃잎이 아니라 저 산을 날아가는 나비인 줄을 나는 왜 몰랐을까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서 있네 ------------------------------------ 10.<해 지는 들길에서>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그늘도 묻히면 길가의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의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춥지 않아도 되니 이 가을은 얼마나 근사한지요 지금 이대로 이 길을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송이로 서고 싶어요 ----------------------------- 11.<강 끝의 노래> 하동에 가 보라 돌멩이들이 얼마나 많이 굴러야 저렇게 작은 모래알들처럼 끝끝내 꺼지지 않고 빛나는 작은 몸들을 갖게 되는지 겨울 하동에 가 보라 물은 또 얼마나 흐르고 모여야 저렇게 말 없는 물이 되어 마침내 제 몸 안에 지울 수 없는 청정한 산 그림자를 그려내는지 강 끝 하동에 가서 모래 위를 흐르는 물가에 홀로 앉아 그대 발밑에서 허물어지는 모래를 보라 바람에 나부끼는 강 건너 갈대들이 왜 드디어 그대를 부르는 눈부신 손짓이 되어 그대를 일으켜세우는지 왜 사랑은 부르지 않고 내가 가야 하는지 섬진강 끝 하동 무너지는 모래밭에 서서 겨울 하동을 보라 -------------------------------------- .김용택 : (1948 ~ ) 전북 임실 출생. 순창농림고 졸업. 1982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21인 신작시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함. .시집:<섬진강>,<맑은날>, <꽃산 가는 길>,<그리운 꽃편지>등을 냈으며 1986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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