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황지우님의 詩

eorks 2007. 4. 30. 21:21

황지우님의

    1.<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 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2.<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 3.<겨울 나무에서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13도 영하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4.<11월의 나무>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5.<너무 오랜 기다림>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내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에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 6.<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미아리 점쟁이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파주 인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꽃이 피었습니다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죽꽃이피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피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꽃이피었습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풀꽃이피었습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꽃이피었습니다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습니다 수국꽃이피었습니다 순천 송광사 명부전(冥府殿) 그늘에 피었습니다 칸나꽃이피었습니다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습니다 백일홍꽃이피었습니다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가에 피었습니다 해바라기꽃이피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피었습니다 그러나,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마천령산맥에 백두산 천지에 그렇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무-슨-꽃-이-피-었-는-지 무슨꽃이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못보았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 황지우 : (1952 ~ ) 전남 해남 출생. 서울대 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 시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겨울 나무로 부터 봄 나무에로>, <나는 너다>,<게 눈 속의 연꽃>등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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