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정호승님의 詩

eorks 2007. 5. 15. 08:07

정호승님의

    1.<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갈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2.<사 랑>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 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 3.<슬픔으로 가는 길>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4.<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 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길은 먼데 무관심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 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 5.<물위에 쓴 시> 내 천개의 손 중 단 하나의 손만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 주다가 내 천개의 눈 중 단 하나의 눈만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리다가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하여 길이 없는 밤은 너무 깊어 달빛이 시퍼렇게 칼을 갈아 가지고 달려와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찔러 이제는 내 천개의 손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내 천개의 눈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 6.<봄 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7.<봄 눈>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 8.<연 어> 바다를 떠나 너이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서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 했을 것이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 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웃음을 떠뜨리며 밤을 밝히리라 ------------------------------------------- 9.<허허바다> 허허바다에 가면 밀물이 썰물이 되어 떠난 자리에 내가 쓰레기가 되어 버려져 있다 어린 게 한 마리 썩어 문드러진 나를 톡톡 건드리다가 썰물을 끌고 재빨리 모랫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팬티를 벗어 수평선에 걸어놓고 축 늘어진 내 남근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에 실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나그네가 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어린 게 한 마리 다시 썰물을 끌고 구멍 밖으로 나와 내 남근을 톡톡 친다 그래 알았다 어린 참게여 나도 이제 옆으로 기어가마 기어가마 -------------------------------------------- 10.<마음의 사막> 별똥 하나가 성호를 긋고 지나간다 낙타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지는 이미 오래다 별똥은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저리도 황급히 사라지고 낙타는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평생을 무릎조차 펴지 못하는가 다시 별똥 하나가 성호를 긋고 지구 밖으로 떨어진다 위경련을 일으키며 멀리 녹두꽃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맡에 비수 한 자루 두고 잠이 드는 사막의 밤 초승달이 고개를 숙이고 시퍼렇게 칼을 갈고 앉아 있다 인생은 때때로 기도 속에 있지 않다 너의 영혼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다 ---------------------------------------------- 11.<까 닭>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 12.<끝끝내>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 13.<그는>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14.<洗足式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물 속에 계속 발을 담글지라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마라 지상의 모든 먼지와 때와 고통의 모든 눈물과 흔적을 위하여 오늘 내 이웃의 발을 씻기고 또 씻길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사랑의 형식을 가르치지 마라 사랑은 이미 가르침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밤마다 발을 씻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거것 앞에 서 있다 가르치지 마라 부활절을 위하여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 --------------------------------- 15.<강변역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 16.<갈대> 내가 아직도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내 발밑에서 물결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아무도 살지 않는 강변에 사는 것은 실패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강한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라는 죽은 새들의 정다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온종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의 삶이 진정 괴로운 것은 분노를 삭일 수 없다는 일이었나니 내가 아직도 바람부는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날아간 하늘에 햇살이 빛나기 때문이다 -------------------------------------- 17.<어떤 사랑>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 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 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 너의 일생이 단 한번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나는 언제나 네 푸른 목숨의 하늘이 되고 싶었고 너의 삶이 촛불이라면 나는 너의 붉은 초가 되고 싶었다 너와 나의 짧은 사랑 짧은 노래 사이로 마침내 죽음이 삶의 모습으로 죽을 때 나는 이미 너의 죽음이 되어 있었고 너는 이미 나의 죽음이 되어 있었다 ---------------------------------- 18.<또 기다림> 그대를 기다리다가 밤하늘에 손톱 하나 뽑아 던졌습니다 그대를 기다리다가 손톱 하나 뽑아 던지고 별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기에 봄밤에 별 하나 뜨지 않는다기에 오늘도 손톱 하난 뽑아 던지고 밤새 울었습니다 기다릴수록 그대는 오지 않고 바라볼수록 그대를 바라볼 수 없어 산도 메아리도 끊어질 때까지 한 사람 가고 나면 또 한 사람 붉은 손톱 뽑아 던지고 별이 되었습니다 ------------------------------------ 19.<북한강에서> 너를 보내고 나니 눈물 난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날이 올 것만 같다 만나야 할 때에 설 헤어지고 사랑해야 할 때에 서로 죽여버린 너를 보내고 나니 꽃이 진다 사는 날까지 살아보겠다고 돌아갈 수 없는 저녁 강가에 서서 너를 보내고 나니 해가 진다 두 번 다시 만날 날이 없을 것 같은 강 건너 붉은 새가 말없이 사라진다 --------------------------------- 20.<휴전선에서> 하늘이 무너질 때까지 너를 기다렸다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엎드려 하늘이 무너지고 눈이 내릴 때까지 너를 사랑했다 눈물 없이 꽃을 바라볼 수 없고 눈물 없이 별들을 바라볼 수 없어 흩어졌던 산안개가 다시 흩어질 때까지 죽어서 사는 길만 걸어서 왔다 녹슨 철조망 사이로 청둥오리떼들은 말없이 날아갔다 돌아오고 산과 산은 이어지고 강과 강은 흘러흘러 누가 내 가슴 속 푸른 하늘을 빼앗아갔을지라도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 별들을 조용히 흔들어보았다 ---------------------------------- 21.<휴전선에서> 그대 봄날에 휴전선 모퉁이에 흰 냉이꽃으로 피어나 울고 있구나 그대 봄날에 휴전선 너머 하얀 찔레꽃으로 피어나 웃고 있구나 밤이 와도 그대는 푸른 하늘 봄이 오지 않은 조국의 푸른 바람 내 언젠가 그대의 강가를 거닐었으나 꽃잎 같던 그대의 발자국 소리를 잊었으나 내 죽으면 그대 가슴에 나를 묻으리 그대 죽으면 내 가슴에 그대 묻으리 22.<다시 휴전선에서>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그때가 죽을 때었다 지금은 헤어질 때가 아니다 그때가 헤어질 때였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전에 이미 사랑하고 있었고 나는 너를 기다리기 전에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보라 그는 무덤이 되어 조국이 되었으나 우리는 사랑이 되어 조국이 되었다 -------------------------------------- 23.<가난한 사람에게>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 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 밖에 걸어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정호승 : (1950년~ ), 대구 출생. 대구 계성중. 대륜고 졸업 1976년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첨성대>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위령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79년 첫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간행후 <서울의 예수> (1982), <새벽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1998) 등의 시집을 간행함.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 수상.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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