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事 成 語 일자천금(一字千金) 一:한 일, 字:글자 자, 千:일천 천, 金:시 금 한 글자엔 천금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아주 빼어난 글자나 시문(時文)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전국 시대 말엽,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과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은 각 수천 명,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 과 위(魏)나라 신릉군(信陵君)은 각 3000 여 명의 식객(食 客)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 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상국 (相國:宰相)이 되어, 어 린(13세) 왕 정(政:훗날의 시황제) 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文信 侯) 여불위(呂不韋:?∼B.C.235, 정의 친아버지라는 설도 있음)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 기거(奇貨可居)'라며 천 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 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사제(私財)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 들였다.
이 무렵, 각국에서는 많은 책을 펴내고 있었는데 특히 순자 (荀子)가 수만어 (語)의 저서를 내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불 위는 당장 식객들을 시켜 30여만 어 에 이르는 대작(大作)을 만들었다.
이 책은 천지만물(天地萬物), 고금(古今)의 일이 모두 적혀 있는 오늘날의 백과 사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대작은 나 말고 누가 감히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의기양양해진 여불위는 이 책을 자기가 편찬한 양《여씨춘 추(呂氏春秋)》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이《여씨춘추》를 도읍인 함양(咸陽)의 성문 앞에 진열시킨 다음 그 위 에 천금 을 매달아 놓고 방문(榜文)을 써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