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事 成 語 징갱취제(懲羹吹제) 懲:징계할 징. 갱:국 갱. 吹:불 취. 제:냉채 제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채를 후후 불고 먹는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함으로써 모든 일에 지나치게 조심함의 비유.
전국 시대 말엽, 진(秦)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초 (楚) 제(齊) 두 나라뿐 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재상 장의 (張儀)는 초 제 동맹의 강화론자(强化論者)인 초나라 의 삼려 대부[三閭大夫:소(昭) 굴(屈) 경(景) 세 왕족의 족장 (族長)] 굴원[屈原: 이름은 평(平), B.C. 343?∼277?]을 제 거하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노렸다.
이윽고 초나라 회왕 (懷王)의 총회(寵姬) 정수(鄭袖)와 영신( 臣) 근상(勤尙) 등 이 굴원을 증오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장의는 곧 그들을 매수하여 굴원의 실각 공작을 폈다. 드디어 굴원이 조정으 로부터 축출되자 장의는 회왕에게 제나라와 단교하 면 진나라의 국토 600리 를 할양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회왕은 제나라와 단교했으나 장의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 았다.
속았다는 것을 안 회왕은 분을 참지 못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대패하고 도리어 접경 지역의 국토까 지 빼앗겼다. 회왕은 지난 일을 후회하고 굴원을 다시 등 용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B.C.299) 어느 날 진나라로부터 우호 증진이란 미명 아래 회왕을 초청하는 사신이 왔다.
굴원은 믿을 수 없는 진나라의 초청에 응해서는 안 된다며 극구 방대했다.
그러나 회왕은 왕자 자란(子蘭)의 강권에 따라 진나라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그 이듬해 객사하고 말았다.
초나라에서는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동생인 자란이 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란에게 책임을 물었으나 이는 도리어 참소 (讒訴)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어 또다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 후 10년간 오직 조국애에 불타는 굴원은 망명 도 하지 않고 한결같이 동정호(洞庭湖) 주변을 방랑하다가 마침내 울분이 복 받친 나머지 멱라(汨羅:동정호 남쪽을 흐르는 강) 에 몸을 던져 수중 고혼(水 中孤魂)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굴원의 넋을 '멱라의 귀[汨羅之鬼]'이라 일컫고 있다.
《초사(楚辭)》에 실려 있는 굴원의 작품 중 대부분은 이 방랑 시절에 씌어진 것 들이다.
그는 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걱정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영신을 미워하며 그의 고고한 심정을 정열적으로 노래했는데 '징갱취제'는《초사》〈9장〉 중 '석송(惜 誦)'이란 시의 첫 구절이다.
[懲於羹者 而吹 제兮(징어갱자 이취제혜)]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체까지 불고 먹는데 [何不變此志也(하불변차지야)] 어찌하여 그 뜻(나약함)을 바꾸지 못하 는가 '석송'은 굴원이 자기 이상으로 주군(主君)을 생각하고 충 성을 맹세하는 선비가 없음을 슬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 고 뭇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것을 분노하며 더욱이 어쩔 수 없는 고독을 한탄하면서도 그 절조만은 변절하지 않 겠다는 강개지심(慷慨之心)을 토로한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