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에 지리산 화엄사(華嚴寺)가 있다.
이 절은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 신라의 진흥왕(眞興王) 때
창건되었는데 조선 시대의 선조 때 이 강산을 침범한 왜군들에
의해 불타 모두 소각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16대 인
조 왕 이후에 차례로 중건된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각황전(覺皇殿)은 순목조(純木造)로서 동양 3
국에서 으뜸가는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 태어나기까지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처절한 사연이 있
다.
임진왜란 때 화엄사가 불타 버리자 주지 스님은 절을 다시 짓
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열심히 염불을 했다. 이 스님은 일반 신도
들은 물론 속세의 세인들에게까지 덕망이 높고 어질기로 이름난
분이었다.
평소에 불심이 지극하고 법력이 높았던 이 스님은 복구에의 염
원을 부처님께 열심히 기구했다. 그 일념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하루는 스님의 꿈에 도승(道僧)이 나타나 말했다.
"주지 승, 듣거라."
"예."
스님은 놀란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도승 앞에 몸을 도사렸다.
"내일 아침에 일찍 아랫 마을로 내려가도록 하라. 내려가는 도
중에 맨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을 것인즉 그분에게 네 뜻을
말하고 간절히 부탁하라. 그러면 그분이 네 정성과 뜻을 가상히
여겨 네가 생각한 대로 절를 지어 줄 것이니라."
"네! 하온데 맨처음에 만날 분이 어떤 분입니까? 도사님."
주지 스님은 도승에 그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서두르지 말라.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느니라. 허허허……"
하고 말한 도승이 사라지자 주지 스님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자기의 정성이 꿈에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알 수 없는
느릇이었다. 도승이 일러 준 절을 지어 준다는 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무관세음보살……"
주지스님은 도승이 말한 대로 내일 아침 새벽에 마을로 내려가
야겠다고 마음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새벽 예불 종소리가 끝나자, 스님은 정장을 하고 산기슭 아래
에 있는 마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이었다. 스님은,
`내가 너무 서두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걱정스러웠다. 마을에 거의 다다를 만큼 왔는데
도 사람의 기척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만날 수 없게 되자
스님은 초조와 실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동네로 접어들었다. 하지
만 들리는 것은 개가 짖는 소리뿐, 마을은 깊은 적막 속에 빠져
있었다.
`아, 내가 한낱 꿈속애서의 일을 가지고……`
스님이 씁쓰레하게 웃으면서 맨 마지막 모퉁이를 마악 돌아설
때였다. 눈앞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와락 몰려드는 기쁨에 들
뜬 스님은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데, 스님은 이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잔뜩 기대를 걸었
던 스님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 사람은 몸둘 곳이 없어 절에
드나들며 부엌일을 돕고 심부름이나 해 주면서 목숨을 이어가는
공양주 할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님은 일단 도승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소승 문안드리오."
하고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했다. 할멈은 뜻밖에도 주지
스님의 인사를 받게 되자 아연실색했다.
"아, 아니 주지 스님께옵서…… 스님…… 쇤네는 공양주 할멈
이옵니다. 스님!"
할멈은 어쩔줄 몰라 하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
는 것이 그녀는 주지 스님이 사람을 잘못 보고 실수를 한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 자리에 꿇어앉아 몸을 더욱 조아리며 장삼
속에서 설계도를 꺼내 놓고는 한 번 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리고 간절히 애원했다.
"소승의 소망은 불타 없어져 버린 절을 다시 복구하는 것이옵
니다. 하오니 절을 지어 주시옵소서."
할멈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한낱 집도 없는 늙어빠진 여자에게
절을 지어 달라니.
"스님! 쇤네는 공양주옵니다."
답답해진 할멈은 몸을 일으킨 스님에게 재차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래도 스님은 다시
"부디 절을 지어 주시옵소서!"
하고 간청했다. 그리고는 옷을 여미고 절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
했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할멈은 헐레벌떡 스님을 따라가
면서 중얼거렸다.
"아이고…… 나처럼 천해 빠진 늙은 계집이 주제넘게 주지 스
님의 절을 받다니 말이나 된느가…… 나 같은 천한 중생이 절을
받다니, 안 돼지! 안 돼."
하지만 그녀는 잰 걸음으로 걸어기는 스님의 뒤를 따를 수가
없었다.
숨이 찬 할멈은 딸아가기를 포기하며 넋두리를 해댔다.
"다 늙은 것이 주지 스님에게 욕을 뵈었으니, 어떻게 해야 좋
단 말인가. 이젠 죽는 수밖에 없지! 난 죽어야 해. 아무 데도 쓰
지 못할 이 하찮은 몸을……"
죽기로 작정한 할멈은 당장에 근처에 있는 강가로 갔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 할멈은 스스로 느낀 죄책감
때문에 짚신을 바위 위에다 가지런히 벗어 놓고 강에 몸을 던
져 자살해 버렸다.
한편, 주지 스님은 절을 복구하게 된다는 일념으로 간절히 염
불을 하던 중, 공양주 할멈이 죽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 내가 꾼 꿈은 허무맹랑한 것이었도다! 공연히 불쌍한 할멈
만 죽게 만들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것으로 나
의 불도(佛道)는 한계에 도달했도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 스님은 번민에 휩싸여 버렸다. 스님
의 처절한 흐느낌은 조용하게 흘러나왔으며 언제까지나 그칠 줄
을 몰랐다.
그런데 그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지리산 주변의 고장 일대가 퍼
졌으며 마침내 관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스님은 살인범
으로 간주되어 벌을 받게 되었다. 살인범은 능지처참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세상의 법도였기에 스님은 멀리 피신하기로 작정
했다.
스님은 할 수 없이 바랑을 짊어지고 두만강을 건너 청국 땅으
로 들어갔다.
스님의 새로운 고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무렵, 청나라 황제는 후사가 없어 늘 외롭게 지내던 중, 나
이 60줄에 들어 뜻밖에도 공주를 얻게 되었다.
황제의 외로움을 알고 있던 백성들은 공주가 탄생했다는 소식
을 듣자 모두들 기뻐했으며 그녀의 만수무강을 바랐다. 온 나라
안이 기쁨으로 들떴으며, 궁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하지만 그같은 기쁨은 잠시 동안만 계속 되었다. 크게 고민하
지 않을 수 없는 엉뚱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세상에 나오면서
울기 시작한 공주가 무슨 이유에선지 한 달이 지났을 때까지 잠
시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것이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울어대
기만 했다. 때문에 황후는 물론 황제까지도 이상하게 생각하며
걱정을 했다.
그 후에도 도무지 울음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황제는 그
만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을 불러서 말했다.
"모처럼 얻은 공주가 한 번 시작한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짐
은 심히 괴롭도다. 그러니 궁궐 밖의 대로상(大路上)에 다락을 짓
고 공주를 그 곳에 두도록 하라."
"폐하, 공주를 어찌 큰 길가에다 버려 두라고 하십니까?"
황후가 비통해하면서 묻자 신하들도 일제히,
"폐하, 노여움을 푸시고 영을 거둬들이심이 가할 줄 아뢰오."
하고 간청했다. 그러나 한 번 영을 내린 황제는 명령을 거두어
들이기는 커녕,
"듣기 싫다! 어서 공주를 다락에 넣어 두고 이름 있는 의원들
을 불러 우는 병을 고치도록 하라!"
하고 크게 화를 냈다. 아무래도 그의 뜻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을 알게 된 황후는 엎드려서 심하게 흐느껴 울기만 했다.
그같은 소문을 전해 들은 스님은 호기심이 생겼으며 한 번 가
서 구경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스님이 중국으로 건
너와 떠돌아 다닌지 1년이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장안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마침내 그는 대궐 앞에 이르렀으며, 공주가 앉아서 울고 있는
다락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
"불쌍한 내 딸!"
마침 황후가 밖으로 나와 우는 공주를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태어난 이래 한 번도 울음을 그친 적이 없
었던 공주가 울음을 딱 그치는 것이 아닌가.
"응……? 아니, 공주가 울음을 그쳤구나!"
황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같은 사실을 신하들에
게 알렸다. 공주는 울음을 그쳤을 뿐 아니라 방실방실 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공주!"
황후는 희한하게도 방실방실 웃어 대는 공주를 보고 기뻐서 어
쩔 줄 몰라 했다.
달려나온 황제도 역시 공주를 안으며,
"핫하하…… 공주가 웃는구나!"
하고 기뻐하면서 번쩍 처들었다. 그런데 공주는 웃고만 있는 것
이 아니었다.
"어머? 공주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며 웃고 있사옵니
다. 폐하!"
"허어! 정말 그렇군!"
황제와 황후는 주위를 흝어보았다.
"폐하! 저기에 있는 저 중을 가리키고 있사옵니다."
"응? 중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주지 스님에게 쏠렸다. 그러자 스님은
급히 그 곳에서 떠나려고 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모
두 자기에게 쏠리자, 문득 조선에서 지었던 죄가 생각났기 때문
이었다.
한데 계속해서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님이 돌아서자 방
실방실 웃던 공주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여보라! 저 스님을 이리 모시도록 하라!"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은 황제는 급히 신하들에게 분부했다.
황제 앞에 부복한 스님은 얼떨떨할 뿐이었다. 자기의 죄상을
알고 잡는 것으로 착각한 그는 본국에서 지은 죄를 낱낱이 고했
다.
"폐하! 저는 죽어야 할 몸입니다. 응분의 벌을 내려 주시옵소
서!"
스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는데 끝까지 그의 죄상을 들은 황
제는,
"알겠소! 짐이 이제야 비로소 크게 깨닫게 된 바가 있도다."
라고 대꾸하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일찍이 부처님의 영험을 알지 못했고, 크고 작은 죄를
많이 범하였으나 스님께서는 과히 허물치 말아 주시오!"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소승,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폐하!"
"공주가 스님을 알아 보고 울지 않는 것은 필시 전생에 스님과
깊은 인연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오. 인연이 있다고 함은 스님과
함께 화엄사에 있떤 공양주 할멈이 공주로 환생한 것을 말하는
것이오. 짐이 곧 스님을 도와 절를 복구할 테니 어서 조선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스님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일로 엄청나게 큰 힘을 얻게
되었다. 황제의 말대로 물에 빠져 죽은 할멈이 공주로 환생했던
것이다. 스님은 그것을 깨닫자, 너무나 감격하여 몸을 더욱 조아
리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어전에서 물러나온 스님은 서둘러 조선으로 돌아왔다. 스님은
화엄사로 돌아오자마자 곧 복구 사업에 착수했다. 꿈에 나타난
도승의 말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양주 할멈이 공주로 환생함으로써 스님의 오랜 숙원을 청나
라 황제가 이루어 준 것인데 그것은 물론 주지 스님의 피나는 정
성과 시련이 아울러 만들어 준 결과였다.
화엄사 법당의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은 황제를 깨닫게 하
여 절을 지었다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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