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의 說話 평강공주(平岡公主) 설화
생몰년 미상. 고구려시대의 공주. 평원왕의 딸이며, 남편은 장군 온달 (溫達)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의하면,
공주는 어릴 때에 잘 울어서, 왕이 희롱하여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
겠다고 말하였다.
그 뒤,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어 왕이 명문귀족 집안에 시집보내려했
지만 공주가 이를 거부하였다. 왕이 노해 궁궐에서 쫓아내니,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혼인하였다. 그녀는 눈먼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바
보스러운 남편 온달에게 무예와 학식을 가르쳤다.
공주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 온달은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되었다.
얼마 뒤, 온달은 매년 3월 낙랑(樂浪)벌에서 열리던 사냥대회에서 남
다른 활약을 보여 왕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온달은 고구려의 장
수로 발탁되었다.
그 뒤, 북주(北周)의 군대가 침공해왔을 때, 온달이 고구려군의 선봉
이 되어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웠다. 평원왕을 이은 영양왕 때, 온
달은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
었다.
그 시체를 넣은 관을 운반하려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달려
와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말하니, 비로소 관이 움직여 이를 매
장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내용에서 전하는 평강공주의 행적은 당시
사회에서는 퍽이나 파격적인 것이다. 그녀는 집안의 문벌이나 권력
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애정에 의해 결혼을 한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또한 불우한 처지의 남편을 도와 입신출세하게
한 현명한 아내의 본보기로 내세워지기도 하였다.
온달전의 내용은 설화적인 면이 짙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허구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 속에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해보려
는 시각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이 풀이해볼 수 있다.
먼저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아, 그리고 위의 내용으로 볼 때도, 온달은
출신이 미천한 바보였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당시 왕실과 혼
인할 수 있는 고급 귀족집안 출신은 아니었고, 아마도 하급귀족 정도
신분의 인사로서 무사로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발탁되었던 인물로 여
겨진다.
그러한 그를 왕이 사위로 맞이하려고 언약하였다. 그런데 이는 당시
신분제도와 관행에 비추어 어려움이 있고, 반발도 있어 왕이 취소하
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주가 언약을 지킬 것을 고집하며 온달에게 시
집갔다.
이 파격적인 공주와 온달간의 결혼을 두고 당시 귀족집안의 사람들이
야유와 시기를 하게 되어, 온달을 미천한 바보로 묘사하는 설화를 낳
게 되었다. 자기들과는 다른 족속이나 신분에 속한 이를 이상하게 생
긴 못난 인물로 묘사하는 예는 고대사회에서 널리 보인다. 이렇게 풀
이해볼 때, 평강공주는 고구려의 귀족사회를 살아갔던 현명하고 정열
적인 한 여인의 모습을 나타내준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溫達傳의 檢討(李基白, 白山學報 3, 1967).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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