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러한 기록들을 복사(卜辭)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주역(周易)의 원형(原形)이라고 본다. 상고시대에는 삼역(三易)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역이란 연산역(連山易) 귀장역(歸藏易) 주역(周易) 등을 말한다. 연산역(連山易) 은 하나라때 사용하던 역(易)이고 귀장역(歸藏易)은 은나라때 사용하던 역(易)이며 주역(周易)은 주나라때 사용하던 역(易)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하는데 어찌됐던 역리(易理)의 골간(骨幹)이 달랐던 것이 아니라 이론의 발전상 역리의 구조가 바뀌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를 증빙할 수 있는 것은 한(漢)나라때의 마왕퇴(馬王堆) 고분(古墳)에서 발굴된 주역의 차서도(次序圖)를 보면 주자(朱子)가 제정했다는 현대 우리가 쓰고 있는 주역의 순차(順次)보다는 훨씬 이론에 합리성이 있다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 마왕퇴에서 태을반(太乙盤)이나 육임반(六壬盤)등이 발굴된 것을 보았을 때 이미 한나라때 기문(奇門) 태을(太乙) 육임(六壬)이 일부계층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었음을 징빙해 주고 있다.
주역이 형성된 후 주역은 선진역(先秦易) 한역(漢易) 당역(唐易) 송역(宋易) 및 청역(淸易)이라는 역사적 발전을 거쳐와 완성된 것이 오늘날의 주역체계(周易体係)라고 본다. 이를 볼 때 주역은 그 시대의 문화나 문물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그 수요에 의해서 발전되었고 발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역의 주석(注釋)된 논리 속에는 한 시대 모든 학자들의 사상이 내집(內集)되어 있고 또 자연의 이치를 창명(彰明)한 자연사상(自然思想)이 체계적으로 해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이 주역이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 그 논리가 발전되었다고는 하나, 실상은 선진(先秦) 이전에 이미 완벽할 정도로 상(象)과 수(數)에 대한 이치가 천명(闡明)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한(漢)나라 주역, 즉 한역(漢易)을 손꼽는 것은 그 시대의 경방(京房)이 주역의 괘효(卦爻)를 부가시켜 납갑(納甲)의 원리를 발명함으로서 역도(易道)를 대비(大備)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그 이후로는 각 국가마다 철학적 이념과 강령의 모양세에 따라서 주역발전상의 많은 제약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주역의 발전을 수정(受精) 배태(胚胎) 형성(形成)의 과정으로 비해 보았을 때 원시역(原始易)이 생성된 이후 선진(先秦)때에 비로소 큰 발전과 주역으로서의 완전한 체계가 성립됐고 그 후의 발전이란 그 시대의 문물이나 정치체제를 반영한 것뿐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