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 /바하마 /파쿠하슨의 일지(日誌)(179)

eorks 2019. 11. 28. 00:14

세계기록유산 /바하마 /파쿠하슨의 일지(日誌)
[Farquharson’s Journal]

The white cliffs of Graham's Harbour, San Salvador

Farquharson’s Journal

Farquharson’s Journal

Farquharson’s Journal

Untitled

The nineteeth century lighthouse on Dixon Hill


국가 : 바하마(Bahamas)
소장기관 : 바하마 기록보관소
관리기관 : 기록물과
등재연도 : 2009년
『파쿠하슨의 일지(Farquharson’s Journal)』는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알려진 와틀링스 섬(Watlings Island) 동쪽에 자리한 프로스펙트 면화 농장(Prospect Hill Plantation)의 소유주이자 경작자인 찰스 파쿠하슨(Charles Farquharson, 1760~1835)이 직접 쓴 일지(日誌)이다. 1831년 1월 1일부터 1832년 12월 31일까지 농장에서 일어난 일상생활을 기록한 『파쿠하슨의 일지』는 바하마에서 발견되었으며 오직 하나밖에 없는 농장 일지이다.

대부분의 농장주가 농장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장주의 생생한 경험으로 기록한 이 일지는 당시의 농장 생활에 대한 독창적인 통찰을 제공해 준다. 농장은 농장주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노예화는 현대 바하마 사람들 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노예화 때문에 오늘날 대다수 바하마인의 선조들이 바하마로 왔다.

고고학 문서와 국가 기록보관소의 기록물과 함께, 이 일지는 노예 해방 이전 바하마 외딴섬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파쿠하슨의 일지』는 하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중요하다. 세계의 어느 기록 보관소에도 이런 독창적인 형태의 일지는 없다. 『파쿠하슨의 일지』는 자메이카의 커피 재배를 일상의 기록으로 남긴 몇 안 되는 일지 중의 하나이며, 커피, 가축, 피멘토(pimento, 고추의 일종) 농장에 대한 사소한 기록도 남아 있어 면화만 단독으로 재배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해 준다.

일지를 쓴 찰스 파쿠하슨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왕당파였으므로 새로 독립한 미국을 떠나 바하마의 프로스펙트 힐(Prospect Hill)에 정착하였다.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던 그는 1803년 산살바도르 섬에서 그레이트 레이크(Great Lake)와 피전 크리크(Pigeon Creek) 사이에 있는 200에이커의 토지를 구입했다. 당시 와틀링스 섬이라고 불렸던 산살바도르 섬을 30년 넘도록 고향으로 삼은 파쿠하슨은 나중에 그 토지를 1,500에이커로 넓혔다.

바하마는 대농장이 없는 주변적인 식민지로서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안티과와 같은 카리브 해 지역처럼 상업적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지는 않았다. 『파쿠하슨의 일지』는 영국의 식민 노예 제도 말기에 쇠퇴해 가는 면화 농장에서의 일상 노동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면화를 재배하여 와틀링스에서 나소(Nassau)로, 그리고 1780년대 중반부터는 영국으로 수출하였지만, 1800년경부터 급격히 쇠퇴하였다. 면화 재배에 실패하고 나서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못한 바하마 사람들은 소금 생산과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농사, 그리고 가축 기르기에 의존했다. 그러므로 『파쿠하슨의 일지』는 바하마에서 사탕수수 경작 이외의 농장 운영을 보여 주는 유일한 일지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파쿠하슨 농장에서의 따분한 일이나 노동의 리듬은 좀 더 노동 집약적인 사탕수수 농장에 비교되는 사탕수수 경제 외의 농장 경제의 일상을 보여준다. 이 일지에서는 노예 제도와 비사탕수수 식민지에서의 면화 농장 노동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일지에는 노예들이 했던 일들-파종과 수확, 면화 처리 과정, 옥수수·완두콩·콩·근채류와 같은 다른 주요 작물의 재배-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수수의 파종과 수확에 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김매기, 자라고 있는 작물 사이에 심기, 수확하기, 새로운 밭 갈기, 벽 쌓기, 도로 청소와 같이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보여 준다. 그런 대부분의 활동은 많은 노예가 수시로 함께 하는 일이고, 몇몇 노예들은 목재 수송, 사료 수확, 낚시, 소금 긁어모으기, 농산물과 목재를 부두로 수송하기 등 다른 일도 하였다.

『파쿠하슨의 일지』는 노예에 대한 주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어 중요하다. 일년 내내 거의 강압 노동에 가깝게 하루 종일 노동을 시키면서 노예에게 의존하는 주인과, 주인에게 의식주를 모두 의존하는 노예들 사이에 미묘한 균형관계가 있음을 파쿠하슨은 인식하였다. 그는 노예들에게 궂은 날씨에 병이 들도록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으며, 단체로 벌을 주는 것도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항상 일꾼들을 노예로서가 아니라 농장 노동자로서 대했다. 파쿠하슨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는 항의와 교섭이 필요하지만, 폭력적 저항과 공공연한 반항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파쿠하슨의 농장에서 있었던 반란의 주동자였던 앨릭(Alick)은 혹독한 처벌을 받고 나소로 추방되었고, 이후에 팔렸다.

『파쿠하슨의 일지』에는 노예들의 여가 생활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1832년 12월 26일(수요일)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꾼 중 몇 명은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고, 몇 명은 집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즐기면서 하루를 보냈지만, 저녁에는 모두 집으로 돌아와 해가 밝을 때까지 즐겁게 춤을 추고 놀았다.”

3일간의 크리스마스 휴일 중 하루에 있었던 ‘즐거운 춤 파티’는 나중에 국가적 축제인 정카누(Junkanoo, John Canoe)로 발전하여 세계로 전파되어 갈채를 받았다.

파쿠하슨은 나소의 스티븐슨 가문(Stevensons)과 오브리엔 가문(O’Briens)과 관련이 있었다. 그의 딸 크리스티나(Christina)는 나소의 헨리 스티븐슨(Henry Stevenson)과 결혼하였다. 크리스티나와 헨리의 딸, 헬렌 마거릿(Helen Margaret)은 나소의 찰스 B. 오브리엔(Charles B. O’Brien)과 결혼하였다. 스티븐슨 가문과 오브리엔 가문은 크게 뻗어 나갔다. 일부는 나소에서 살았고, 또 일부는 영국과 미국으로 갔다.

파쿠하슨은 ‘워털루 앞 웰링턴 해변에 배를 상륙하도록 명령을 내린 영광을 안았던’ 영국 해군 장교 윌리엄 네언(William Nairn)과 잘 알고 지냈다. 워털루 전투 이후 해군에서 나온 네언은 바하마로 와서 캐롤라이나에서 온 왕당파인 아치볼드 테일러(Archibald Taylor)의 딸과 결혼하여 와틀링스 섬에 정착하였다.

산살바도르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 도착한 곳으로 유명하다.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12일에 산살바도르에 도착하였다.

파쿠하슨은 미국 남부의 항구들과 자메이카 사이를 항해하는 배의 선장들과 접촉하였다. 그 선장들 중에는 매키니(McKinney) 선장(벌러섬 호)과 솔터(Salter) 선장(엔터프라이즈 호)이 있었다. 솔터 선장은 여러 가지 화물을 싣고 사바나 지역과 자메이카 사이를 항해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쿠하슨의 일지(日誌) [Farquharson’s Journal]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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