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형유산 /룩셈부르크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Hopping procession of Echternach]
요약 : 해마다 성령강림제(기독교의 축일) 다음에 오는 첫 번째 화요일이면 룩셈부르크의 가장 유서 깊은 도시인 에히터나흐(Echternach) 시내의 중세 도심 지구에서는 발을 맞춰 가볍게 뛰어오르는 모양으로 춤을 추는 호핑 댄스 행렬이 이어진다. 호핑 댄스 행렬은 1100년 이후부터 계속되어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핑 댄스 행렬은 에히터나흐 대수도원의 설립자이자 수도사이며, 선교 활동과 친절함, 특정한 질환을 치료하는 능력으로 존경받는 성 빌리브로르트(Saint Willibrord, 657~739, ‘빌리브로르도’라고도 함)를 향한 숭배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 행렬은 이교도적인 요소 때문에 교회의 반대에 부딪혀왔고, 계속해서 금지 명령을 받기도 했지만 행렬의 전통은 에히터나흐 외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사회 각계각층 속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이 행렬은 룩셈부르크와 다른 여러 나라의 고위 성직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유서 깊은 수도원의 안뜰에서 이른 아침에 시작된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된 풍습에 따라 가수들이 신도송(信徒頌)을 암송하고 그 뒤에 8,000명의 춤꾼들이 45개 무리로 나누어 춤을 추며 행진한다. 이 행렬은 바실리카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오늘날의 행렬은 기도와 노래, 춤을 통해 표현되는 전통 있는 종교적 행사로 예배의 역사적 형태를 보여 준다. 오늘날, 세속화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은 에히터나흐 시와 종교 당국의 후원을 받으며, 날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으며, 해마다 룩셈부르크 전역과 이웃 지역에서 평균 13,000여 명의 참가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국가 : 룩셈부르크(Luxembourg)
등재연도 : 2010년
지역 정보 :
호핑 댄스 행렬은 룩셈부르크의 가장 역사가 깊은 도시인 에히터나흐에서 열리며 항상 도심으로 이어지는 중세풍의 거리를 통과하는 동일한 경로를 따라 이동한다. 유서 깊은 수도원의 안뜰을 출발하여, 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자우어(Sauer, Sure) 강의 다리를 향해 간다. 행렬은 쉬르(Sûre) 거리와 몽타뉴(Montagne) 거리를 통과한 뒤 시장 광장에 도착한다. 그런 다음, 가르(Gare) 거리와 메르시예(Merciers) 거리를 따라 바실리카 쪽으로 이동한다. 행렬은 교회에서 끝이 나고, 춤꾼들은 교회의 지하 묘지에 안치된 성 빌리브로르트의 묘를 참배한다.
본문 :
이른 아침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에히터나흐에 도착한다. 지난 일요일 오후에 독일의 아이펠(Eifel)을 출발해 길을 나선 사람들은 보통 행렬이 출발하는 자우어 강의 왼쪽 둑에 도착해 환영을 받는다. 이들은 바실리카로 안내를 받고 미사에 참여한다. 오전 8시 15분, 첫 번째 참가자 그룹이 유서 깊은 사원의 안뜰에 모여든다.
본 행렬을 주관하는 ‘빌리브로르트 협회(Oeuvre St Willibrord)’의 구성원들이 춤꾼들의 그룹과 동행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순례자들을 성 빌리브로르트 수도원에서 맞이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다고 한다. 19세기에 에히터나흐 교구가 순례를 주관했고, 이후 성 빌리브로르트의 신도 수를 늘리기 위해 애쓰는 빌리브로르트 협회가 그 책임을 지게 되었다. 행렬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이밖에도 경찰이라든지, 구급요원 등과 같은 다른 기관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복장에 관해서는 특별히 정해진 규정이 없지만 대부분이 에히터나흐 춤꾼들과 비슷하게 검은색 바지나 스커트 위에 흰색 셔츠나 블라우스를 차려입는다. 민속 의상은 입을 수 없다. 각각 열을 맞추어 선 춤꾼들은 흰색 손수건이나 스카프를 맞잡아 서로 서로 연결한다.
오전 9시 15분에, 룩셈부르크 대주교가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인사를 한다. 그런 다음 행렬이 이동하기 시작하는데, 선두에서 가수들이 성 빌리브로르트 신도송을 부르면 그들을 따르는 순례자들은 저마다 묵주신공을 드린다. 그런 다음 1열에 5명씩 약 45개 그룹으로 춤꾼들이 나누어 뒤를 따른다. 악단은 춤꾼들이 교대로 쉴 수 있도록 순서를 바꾸어 가면서 전통적인 행진곡을 연주한다.
행렬은 유서 깊은 수도원을 떠나 쉬르 다리(자우어 다리)를 향하며, 쉬르 거리와 몽타뉴 거리를 가로 질러 시장 광장을 향해 간 다음 가르 거리와 메르시예 거리를 거쳐 바실리카에 도착한다.
춤꾼들이 추는 춤 모양은 왼발, 오른발을 차례로 사선 방향으로 움직이며 살짝 뛰며 앞으로 행진한다. 아이펠 지역에서 온 춤꾼들은 특히 이 대각선의 모양으로 발을 움직이는 것을 강조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 ‘에히터나흐 행렬처럼 전진하라(세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와 같은 속담과는 달리 춤꾼들은 뒤로 가지는 않는다.
오늘날 호핑 댄스에 반주하는 행진곡은 20세기 초에 전통적인 곡조를 행진곡으로 편곡했던 룩셈부르크의 작곡가 막스 메나제(Max Menager)의 작품이다. 이 독창적인 행진곡은 특별히 종교적이지 않고, 민속 음악과 비슷하다. 이 행진곡은 한때 플루트, 바이올린, 트럼펫, 백파이프 등을 연주하는 당시의 순회 음악가들이 연주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각각의 브라스 밴드에 소속되어 있지만 이밖에 바이올린, 플루트, 아코디언 연주자 그룹도 참여한다.
행렬이 바실리카에 도착하면, 순례자들은 오른쪽 통로를 따라 지하 묘지로 내려가서 성인의 묘지를 참배하고 은화를 던진다. 그런 다음 다시 바실리카로 올라와 왼쪽 통로를 통해 빠져 나간다.
참가자의 수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에히터나흐 사람들로 이루어진 마지막 그룹은 대략 오후 1시 경에 바실리카에 도착한다. 호핑 댄스 행렬은 일찍이 중세 초기부터 있었으며, 약 1100년 경 티오프리트(Thiofrid, Thiofridus Epternacensis, 1081~1110 재임) 에히터나흐 수도원장은 성령강림절을 맞아 성 빌리브로르트의 묘지를 참배한 수많은 사람들에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춤추는 성자들’은 15세기 말 이래로 에히터나흐 순례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춤추는 성자들은 아이펠의 바크슈바일러(Waxweiler) 교구에서 왔는데, 이후 점차 다른 춤꾼들이 이 행진에 참여하면서 결과적으로 가볍게 깡충깡충 뛰는 춤을 추는 호핑 댄스 행렬로 발전했다. 종교적인 춤의 유래는 그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되었다. 그것은 기쁨의 표시이자 기도인 동시에 ‘성 비투스(St Vitus)의 춤(무도병, chorea)’과 같은 질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본 행렬과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자신의 악행 때문에 벌을 받고 춤을 추는 주문에 걸린 사람들을 성 빌리브로르트가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한다.
지나친 행동을 우려한 교회는 성스러운 춤을 금지시켰지만 에히터나흐 수도원에서는 이 춤꾼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보호해 주기도 했다. 순례자들은 정부나 종교 당국이 내린 모든 학대나 금지 명령에 대해 법적 조치까지 취하며 그들의 춤을 지켰다. 성직자들은 이 순례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맞섰고, 그 결과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황제, 대주교, 혁명정부가 내린 금지 명령을 무시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1941년 나치 치하에서 행렬은 딱 한 번 바실리카 안에서 진행된 적도 있었다. 그 뒤의 억압조치로 에히터나흐 시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1945년까지 행렬은 다시 진행되지 않았다. 독일의 순례자들은 1949년부터 다시 호핑 댄스 행렬 참여하기 시작해 그 뒤로 계속해서 참가하고 있는데, 적대적인 감정이 사라지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17세기의 역사가 트리어(Triers)의 브라우어르(Brouwer, 1559~1617)는 춤에 대한 애착을 ‘에히터나흐에서는 신자들이 여느 때처럼 춤을 추지 않으면 헛간에서 소들이 춤추기 시작한다.’라고 잘 묘사했다. 춤이 맹세에 대한 응답이라는 1500년경의 묘사를 보면 춤이 마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이러한 성격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분명하지 않지만 순례와 춤에 대한 참가는 거의 한 번도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은 일종의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반사작용이다.
행렬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서로 섞어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교파에 상관없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행렬에 참가하며, 누구도 호핑 댄스 행렬이 배타적인 가톨릭 행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춤 공연이 완전히 개방되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의 선택에 따르는 것이지 언제나 종교적인 의미의 행사는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춤이란 이렇게 보편적이면서 시대의 제약을 받지 않는 현상이다.
지역 문화 전통으로서 호핑 댄스의 중요성은 이 지역의 음악가라면 누구나 이 행렬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춤을 추기 위해서 음악이 필요함은 명백하므로 음악가가 호핑 댄스 행렬에 연주하지 않는다면 시장이나 다른 세속적 축제에서도 연주할 수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히터나흐의 호핑 댄스 행렬 [Hopping procession of Echternach]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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