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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 /남아프리카공화국 /1991년~1992년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CODESA)의 기록물 및 1993년 다당협상 기록물(293)

eorks 2020. 3. 23. 00:13

세계기록유산 /남아프리카공화국 /1991년~1992년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CODESA)의 기록물 및 1993년 다당협상 기록물
[Archives of the CODESA(Convention For A Democratic South Africa) 1991-1992 and Archives of the Multi-Party Negotiating Process 1993]

국가 : 남아프리카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
소장 및 관리기관 :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문서 및 기록기관(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Service, NARS)
등재연도 : 2013년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Convention for a Democratic South Africa, CODESA)’는 1991년 12월 20일 켐튼 파크(Kempton Park)에 있는 세계무역센터에서 출범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19개 정당이 회담에 참여하여 의향서(declaration of intent)에 서명하였다. 이 의향서에 서명함으로써 모든 정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새로운 민주 질서의 원칙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의 목적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정책)와 차별로부터 해방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었다.

즉, 과거로 인한 상처를 씻고, 경제발전과 사회 정의를 실현하여 모든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평화 헌법 개정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2년 5월에 실시된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 II에서는 보다 진전된 토의가 이루어졌다. ‘다당협상포럼(Multi Party Negotiating Forum, 이하 MPNF)’은 회담에 뒤이어 1993년에 개최되었다.

다당협상포럼은 1993년 4월 1일부터, 켐튼 파크 내 세계무역센터에서 개최되었다. 모두 26개 정당이 참여하였다. 헌법 조항, 기본 권리, 독립 선거관리위원회, 독립 방송위원회, 임시 집행 위원회, 그리고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위한 기술 분과위원회 등의 여러 기술 분과위원회들이 설치되었다. ‘국가상징’에 관한 위원회 역시 새로운 국가(國歌), 국기, 국가 문장(紋章)을 제정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위한 임시 헌법’, ‘임시 집행 위원회’의 설치가 승인되었고, 선거일을 결정했으며, 독립성을 지닌 선거·미디어·방송 위원회에 대해 합의하는 등 보다 중요한 몇 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MPNF에서 직접 결정하였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
1980년대에 이르러 국민당(National Party) 지도부는 투옥 중인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의 몇몇 지도자들과 시험적으로 회동하기 시작하였다. 무장 투쟁과 도시 내 소요 사태로 남아프리카공화국 내에서의 혼란이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민중 운동은 점차 이 나라를 통치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갔다. 세계적으로는 국제연합(UN)은 ‘아파르트헤이트는 인류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라고 선언하였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이 일어났으며, 백인 정권을 피해 망명한 수많은 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에 의해 세계 곳곳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비인도적인 행위가 전해졌다.

1980년대 내내 다카르·세네갈 등지에서 일부 아프리카너(Afrikaner,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주로 네덜란드계 백인들) 여론 주도자들이 아프리카민족회의와 회동하기 시작하였다. 백인들의 여론도 대결과 억압에서 점차 참여의 방향으로 매우 더디게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가해진 군사적 제재 조치에 더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가 시작되었다. 세계 공동체가 ‘스포츠 보이콧’을 개시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점차 고립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나미비아와 앙골라에서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재정은 고갈되어갔다.

시험적인 회동 이후에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1936.3.18~) 대통령은 1990년 2월 마침내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범아프리카주의회의(PAC)를 위시한 여러 조직에 대한 해금 조치를 단행했다. 뒤이어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와 그밖에 여러 정치범들을 신속하게 방면하였다. 1990년 5월 4일 일련의 협상이 케이프타운의 대통령 관저에서 열렸다. 협상의 결과 아프리카민족회의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자국 내의 폭력적인 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 내에서 협상과정을 방해하는 요인을 제거하는 데 합의하는 ‘흐로터스휘르 의사록(Groote Schuur Minute)’이 도출되었다.

이어진 회담을 통하여 1990년 8월 6일, 중요한 핵심 쟁점에서 추가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에 더하여 아프리카민족회의 역시 무장투쟁 중단을 합의한 ‘프리토리아 의사록(Pretoria Minute)’이 채택되었다. 1990년 9월 14일 마침내, 27개의 정치 단체 대표가 ‘민족평화협정(National Peace Accord)’에 서명하였고, 이후 공식 협상을 진행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착수되었다.

1991년 12월 20일,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CODESA I)가 켐튼 파크에 있는 세계무역센터에서 첫 번째 본 회의를 개최하였다. 구체적인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무그룹이 임명되었다. 1992년 초, 협상 지속 여부에 관하여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백인들만 참여하여 실시한 결과 68% 이상의 유권자가 ‘네’라는 긍정적인 답변을 선택했다. 1992년 5월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 II가 개시되었으나 6월에 ‘보이파통 학살(Boipatong massacre, ANC 활동가와 정부 지원을 받은 잉카타 전투원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인한 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아프리카민족회의는 협상 테이블에서 철수하였고 이로써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 II는 막을 내렸다.

1992년 9월,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대중동원투쟁(Rolling mass Action)’ 프로그램의 하나로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민중 시위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내 명목상의 독립국이자 반투스탄(Bantustan, 반자치 흑인 구역)이었던 시스케이(Ciskei)의 수도 비쇼(Bisho)에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위 도중 아프리카민족회의 시위 군중 중에 28명이 시스케이 방위군의 발포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훗날 ‘비쇼 대학살(Bisho Massacre)’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 참사를 계기로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 I 및 II에 참여하여 서둘러 정치적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새로운 긴장감을 인지하게 되었다. 1992년 9월 정부와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양해 각서(Record of Understanding)’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93년 4월 1일, 다당협상포럼이 열렸다.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었고 다당협상포럼은 1993년 11월 18일 마침내 ‘남아프리카공화국 임시 헌법’을 비준했다. 그리고 이어서 민주적인 절차에 의거하여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국정을 운영할 임시집행위원회가 임명되었다. 1994년 4월 27일 전국민이 참여하는 선거의 결과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득표율은 62%, 국민당의 득표율은 20%였다. 1994년 5월 10일, 넬슨 만델라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취임하게 되었고, 데 클레르크는 국민당 소속의 부통령 중 하나가 되었다.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과정은, 반드시 1989년 폴란드에서부터 시작하여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막을 내린 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이라는 배경 하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공산권의 화해는 냉전의 종식을 이끌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운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시 그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공산주의가 그들 문화와 종교에 대해 ‘총공격(total onslaught)’을 하고 있다는 정치 선전에 빠져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몰락하게 되면서 공산주의의 총공격이라는 선전은 효력을 잃게 되었다. 덕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들은 협상에 대하여 보다 개방적인 태도로 임할 수 있었다.

세계의 이목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민주적으로 치러진 최초의 총선거라는 결말을 만든 협상 과정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1994년 4월부터 6월까지 르완다에서 대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성공의 이면에 자리한 아이러니였다. 세계가 지켜 서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단 몇 주 사이에 8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초의 남아프리아공화국 정부는 1995년 ‘국민화합및화해증진에관한법률(The Promotion of National Unity and Reconciliation Act, 1995년 제34호)’을 통과시켰고, 그 결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훗날, 협상 과정 및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유엔이 탄자니아 아루샤(Arusha)에 설치한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에 도움을 주게 된다. 그 사람들 중 대표적 인물이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와 다당협상포럼에서 정부 측 협상 책임자 역할을 맡았던 룰로프 마이어(Roelf Meyer, 1947~)이다. 이 기록유산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문서 및 기록기관(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Service, NARS)에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1991년~1992년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회의(CODESA)의 기록물 및 1993년 다당협상 기록물 [Archives of the CODESA(Convention For A Democratic South Africa) 1991-1992 and Archives of the Multi-Party Negotiating Process 1993]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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