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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 /폴란드 /보헤미아형제단의 문서들과 장서(306)

eorks 2020. 4. 6. 00:12

세계기록유산 /폴란드 /보헤미아형제단의 문서들과 장서
[Files and library of the Unity of the Brethren]

Archiwum Panstwowe W Poznaniu, Or. Rafal from Leszno Radziejów governor certifies that the municipality gave the Brethren and the rector of the school in Leszno 9 rods role in Leszno, which box was in use from the late Rafal Leszczynski, Castellan Przemęcki - noble Lukasz Malachowski. Year: 1579.

Archiwum Panstwowe W Poznaniu, Or. Stanislaw I / Leszczynski / Polish king - at the request of Samuel Hartman's lawyer confirmed all the privileges and liberties granted by his predecessors municipality of the Brethren / coctus Bohemicas confessionis /. Year: 1736.

Archiwum Panstwowe W Poznaniu, Jan Amos Comenius of Amsterdam on the Collect. Year: 1656-1657. Letter. Page 1.

Archiwum Panstwowe W Poznaniu, Jan Amos Comenius of Amsterdam on the Collect. Year: 1656-1657. Letter. Page 2.

Archiwum Panstwowe W Poznaniu, Jan Amos Comenius of Amsterdam on the Collect. Year: 1656-1657. Letter. Page 3.

Archiwum Panstwowe W Poznaniu, Frederic Bonnet from London. Year: 1718-1720. Letter. Page 1.

Archiwum Panstwowe W Poznaniu, Frederic Bonnet from London. Year: 1718-1720. Letter. Page 2.

Archiwum Panstwowe W Poznaniu, Patrick Gordon from Reading / England /. Year: 1695-1700. Letter. Page 1.

Archiwum Panstwowe W Poznaniu, Patrick Gordon from Reading / England /. Year: 1695-1700. Letter. Page 2.


국가 : 폴란드(Poland)
소장 및 관리기관 : 포즈난 국가기록보관소(Archiwum Państwowe w Poznaniu)
등재연도 : 2015년
‘보헤미아형제단의 문서들과 장서(Files and library of the Unity of the Brethren)’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등장한 ‘후스주의 운동(Hussite movement)’ 중 평화주의 일파이며 교단인 ‘형제단(Jednota bratrská, Unity of the Brethren, 또는 형제교회, 형제단교회, 형제단공동체라고 불리기도 함)’에 관한 증거로서 전 세계적으로 고유한 기록물이다.

보헤미아형제단 공동체는 복음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며 사회적 평등을 실천하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로 한 사람들로 개신교(Protestantism)와 근대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이 컬렉션은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는 안식처를 찾기 위해, 품위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물질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자유로운 종교 및 정치적 견해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찾기 위해 이주한 지역인 폴란드에서 보헤미아형제단이 보여준 이례적인 관용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그들은 폴란드에서 15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발전적 활동을 펼치면서 조직의 연속성 및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그들의 활동과 사상의 창조적 교류는 형제단과 유럽의 모든 개신교 중심지들 사이에 오고간 어마어마한 양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물들은 종교전쟁으로 분열되었던 당시 유럽 내에서 지극히 이례적이었던 공간인 옛 폴란드에서 실현된 여러 민족과 교파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증언이다. ‘보헤미아형제단의 문서들과 장서’는 얀 아모스 코멘스키(Jan Ámos Komenský, 1592~1670, ‘코메니우스(Comenius)’)의 활약과 교육제도로 잘 알려진 개신교의 정치적 · 경제적 · 지적 · 창의적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탁월하고도 완전한 자료이다.

세계적 중요성 · 고유성 · 대체 불가능성 :
16세기에 폴란드에서 설립된 ‘형제단 교회(Church of the Unity of the Brethren)’는 다민족 · 다언어 · 다문화 공동체로서 이 공동체에는 독일인 · 폴란드인 · 체코인 · 스코틀랜드인이 있었다. 게다가 형제단 공동체는 편지를 주고받거나 여행을 통해 만나거나 하여 유럽의 모든 개신교 중심지와 접촉하였다. 따라서 형제단 공동체와 그 영적 프로그램은 유럽의 한 가운데에서 여러 민족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형제단의 기록물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간의 상호 관용과 이해를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관련 자료는 관용을 교육하는 자료로서 여러 사례들을 담고 있으며, 사람은 서로 다를지라도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사례들과 ‘차이’라는 것은 오히려 영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요소일 뿐이라는 교훈적 사례를 담고 있다.

17세기 들어 전쟁으로 인해 형제단 공동체가 와해되었으므로 형제단 교회가 남긴 유산은 이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이 문서들과 장서는 18세기에 갖은 노력으로 재건되었지만 19세기에 들어 날로 거세지고 대담해진 민족주의의 등장으로 다시 해체되고 말았던 다민족 · 다언어 · 다문화 공동체에 대한 증언이다. 이 컬렉션이 귀중한 또 하나의 이유는 ‘형제단의 문서들과 장서’라는 형식으로 보존되어온 하나의 세계가 더 이상 이들 문서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더불어 개신교 단체의 한 교파인 ‘형제단’의 문서들과 장서가 다른 곳도 아닌 왕실 전체가 가톨릭을 믿는 나라에서 만들어졌고, 그러고도 훌륭한 상태로 완벽하게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며 이례적인 사례이다(군주들이란 대개 자신의 백성들이 자신의 신앙과 같은 신앙을 갖도록 강요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실은 14세기에 이미 가톨릭교도, 정교도, 아르메니아인, 타르타르인, 유태인, 독일인 등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며 각종 종교를 실험했던 폴란드의 민주주의와 관용이 당대의 다른 나라의 기준에 비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16세기에 들어서는 폴란드와 독일 · 체코 · 스코틀랜드 출신의 루터파 · 칼뱅파 · 형제단 등의 개신교도들도 합류했다.

1570년, 폴란드에서 활동했던 여러 개혁 개신교 교파가 반종교개혁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서로를 헐뜯는 다툼을 끝내고자 산도미에시(Sandomierz)에서 협정을 체결했다. 성례(聖禮, sacrament, 성사)와 설교자(preacher)를 서로 인정하기로 합의하였고, 공동의 세계종교회의를 계획하였으며,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의 동등한 권리를 상정한 세임(Sejm, 폴란드 의회) 결의 초안도 작성되었다.

산도미에시 협정은 1573년 폴란드의 세임이 채택한 바르샤바 동맹(Confederation of Warsaw)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 협정은 모든 종파 간에 무조건적이고 영구적인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종교에 상관없이 귀족 · 시민 대표 그리고 모든 자유민에게 공법 및 사법상의 완전히 평등권을 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제단의 문서들과 장서’는 유럽의 문화 및 교육 제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들, 요컨대 천재적인 이상주의자였던 얀 아모스 코멘스키와 박학다식한 얀 욘스톤(Jan Jonston, 1603~1675)의 활동을 보여주기 때문에 또한 더욱 중요하다. 레슈노(Leszno)에 있는 보헤미안 공동체의 감독이었던 코멘스키는 중세의 교육 철학을 발전시켰고 네덜란드에서 그 철학을 널리 전하였으며 이로써 그의 이상은 주류 유럽 속으로 흡수되게 되었다.

체코 출신의 교육자인 코멘스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난 새로운 보헤미아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코멘스키는 보편적인 범교육(汎敎育)을 선호했고, 지식의 여러 분야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각국의 언어를 사용한 폭넓은 교육을 토대로 6년제 보편 교육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 다음 단계로는 라틴어를 교육 언어로 하는 6년제 중등학교 체계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 체계는 다음과 같다.

1학년에게는 문법을 중심으로 라틴어 구어체와 함께 성경의 역사, 형이상학의 기본 기념을 가르친다. 2학년에게는 물리학을 중심으로 자연철학의 하나인 물리학을 가르치고 동물학 · 식물학 · 광물학 · 해부학 · 인체생리학 등과 같은 자연사를 보충한다. 3학년에게는 수학을 중심으로 가르치되 지리학과 천문학, 그리고 예술 · 발견 · 발명의 역사도 함께 가르친다. 4학년에게는 윤리학과 도덕성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5학년에게는 변증법에 중심을 두되 논리학 이외에 여러 민족의 종교 제의 역사를 가르친다. 6학년에게는 수사학과 세계사를 가르친다.

코멘스키는 이와 같은 이상적인 프로그램을 구상했고 욘스톤은 망명지인 폴란드에서 김나지움(gymnasium, 중등학교)의 실상에 맞도록 이 계획을 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레슈노의 김나지움에 알맞은 교육 및 양성 프로그램이 마련되었고, 이 학교는 높은 수준의 교육과 최신식의 교수법을 제공했기 때문에 매우 명망 있는 교육 기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코멘스키 덕분에 레슈노의 김나지움에서는 폴란드어 · 독일어 · 체코어 3개 언어를 통한 문체 훈련 교육을 실시했다. 교수법 이외에도 코멘스키는 신학 · 철학 · 언어학 · 시학에 관심이 있었고, 레슈노의 학교에서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희곡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코멘스키가 교과서를 직접 저술했다는 점이다. 그가 쓴 라틴어 교과서는 매우 인기 있었다.

1631년에 레슈노에서 처음 출간된 이래에 여러 언어로 수차례에 걸쳐 재출간되었다. 1633년에는 물리학과 천체학 교과서를 출간했고, 취학 전 유아동의 교육에 관한 책도 저술했다. 그러나 코멘스키가 스스로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여겼던 것은 완벽하고 조직화된 세계관을 제공하는 인간 지식의 모든 것을 통합한 범지학(汎知學, Pansophy)에 관한 것이었다.

1641년 코멘스키는 반(反) 왕당파 진영에 속한 영국의 지식인들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그들은 교육제도를 개혁하여 자연과학 및 기술 분야의 성취를 인류 발전을 위해 적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1642년 영국 내전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코멘스키는 영국을 떠나 스웨덴에 초청되어 스웨덴의 학교 교과서를 준비해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코멘스키는 이때까지도 스웨덴 사람들이 그가 보기에 절대주의와 반종교개혁의 화신으로 여겨진 합스부르크 세력에 맞서서 이기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보헤미아의 해방을 가져올 것이며 뿐만 아니라 장기간 유럽에 평화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648년, 스웨덴은 이전의 약속과 달리베스트팔렌 평화조약(Peace of Westphalia)을 통해 여전히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아래 보헤미아를 두기로 하였다. 레슈노로 돌아온 코멘스키는 1649년 이래로 예드노타 브라트르스카(Jednota bratrská, 보헤미안 형제단)의 단독 감독(bishop)으로 임무를 수행했으며 1650년에는 헝가리의 샤로슈퍼터크(Sarospatak)에 있는 한 학교의 총장직을 수락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에 저항하도록 트란실바니아의 지배자들을 독려하였다.

1654년 다시 한 번 레슈노로 돌아온 코멘스키는 ‘스웨덴 대홍수(Swedish Deluge)’ 동안 스웨덴 군대가 계속해서 레슈노에 주둔하기를 바랐다. 코멘스키 생각에는 스웨덴인들이 통치하는 편이 체코인들뿐만 아니라 폴란드인들에게도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레슈노에서 화재가 발생한 후 코멘스키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했다. 코멘스키는 개신교 국가들 사이의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스웨덴은 덴마크와, 영국은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고통만 가중될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코멘스키는 그의 주된 과업이 ‘인간적인 일을 개선하는’ 복안을 구상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전쟁과 폭력, 부당함으로부터 해방된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러 갈등의 원인이 종교에 있다고 본 코멘스키는 세계 평화라는 이상이 ‘에큐메니즘(Ecumenism, 기독교의 교파와 교회를 초월하여 하나로 통합하려는 세계교회주의)’라는 이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모든 기독교 교파를 하나로 통합하는 에큐메니칼 회의(Ecumenical Council)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는 국왕들과 민족에게 전쟁 중단을 촉구했고 군주에 의한 폭정, 고용주에 의한 노동자 착취,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선주민 착취 등 모든 폭력을 비난했다. 코멘스키는 모든 인간이 정치의 자유는 물론이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유를 향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 자유라고 해서 모든 악을 허용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형제단이 추구한 엄격한 도덕적 원칙을 언제나 지켜야할 규범으로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악을 잔혹한 형벌이나 징역, 추방 등으로 벌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지 알면 옳은 일을 행할 수 있으며, 그는 이러한 모든 것은 모든 사람에게 포괄적인 교육(汎敎育)을 제공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코멘스키는 학자들의 세계 대학이 교육 문제를 감독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계의 모든 민족이 상호 이해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유로운 토론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만국 공통어를 창안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아울러 인류가 직면한 여러 난제는 오직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해결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코멘스키가 구상했던 이런 여러 가지 아이디어 중 상당 부분이 오늘날 하나의 프로그램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 얀 아모스 코멘스키라는 인물과 그의 교육사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400주년을 맞이한 1992년, 유네스코와 체코공화국 정부는 코메니우스 메달(Comenius Medal)을 제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헤미아형제단의 문서들과 장서 [Files and library of the Unity of the Brethren]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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