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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영국 /리버풀-해양 무역 도시(529)

eorks 2020. 11. 22. 12:50

세계문화유산 /영국 /리버풀-해양 무역 도시
[Liverpool-Maritime Mercantile City]
요약 : 해양 무역 도시 리버풀의 역사적 중심지와 항만 구역 등 6개 지역은 18세기~19세기에 세계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던 이 도시의 발전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리버풀은 대영 제국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미국으로 이주하는 북유럽인과 노예 등 인구의 대량 이동을 위한 주요한 항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리버풀은 근대 하역 기술과 수송 체계, 항만 관리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리버풀에는 세인트조지 플래토(St George’s Plateau)를 비롯한 많은 중요한 상업 및 민간 건물, 공공건물들이 있다.

리버풀

리버풀

리버풀

리버풀

리버풀

리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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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리버풀

리버풀

리버풀

리버풀

리버풀

리버풀

    국가 :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위치 : 잉글랜드(England), 리버풀(Liverpool)
    좌표 : N53 24 24,W2 59 40
    등재연도 : 2004년
    리버풀-해양 무역 도시 :
    리버풀 시와 항구는 18세기~19세기 해양 무역문화의 발전을 보여 주는 훌륭한 예로서 대영 제국의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리버풀은 세계적인 무역 항구 도시의 훌륭한 사례로 당시 일찍부터 국제 무역이 발전하고 있었으며, 대영 제국의 전 지역에 걸쳐 활발한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리버풀은 18세기~19세기 부두 건설 및 항만 관리와 관련된 혁신적 기술과 방법을 주도한 중심지였다.

    해양 무역 도시 리버풀의 역사적 중심지와 항만 구역 등 6개 지역은 18세기~19세기에 세계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던 이 도시의 발전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최초의 증기선이 1840년 리버풀에서 출항한 이후 리버풀은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요충지가 되었으며 사람들이 이동하는 주요 항구가 되었다. 리버풀은 1807년 노예무역이 폐지될 때까지 노예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북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는 인구 이동의 중심지였다.

    유럽 전역에서 온 수천 명의 사람들은 신세계로 이주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다. 리버풀은 근대 하역 기술과 수송 체계, 항만 경영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기 소개된 지역들에는 세인트조지 플래토를 비롯한 많은 중요한 상업 및 민간 건물, 공공건물들이 있다.

    과거 리버풀 부둣가의 광경은 오늘날과 무척 달랐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변이 있는 이곳은 과거에는 머지(Mersey) 강의 감조 구역(感潮區域, 하천 하류에서 조석의 영향을 받아 수위가 변하는 구간)으로 풀 지역(the Pool)과 합쳐진 데서 ‘리버풀(Liverpool)’이란 지명이 유래했다. 머지 강은 아일랜드 해로 흘러 들어가는 조수 독(dock, 수문으로 들어가는 조수를 조절하는 장치)으로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리버풀은 존 왕(King John) 시대에는 해상 무역 발생의 근원지가 되었다.

    1207년 존 왕은 칙허를 내려 리버풀을 특권 도시로 승인했다. 또한 리버풀은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계류장이었다. 이 지역 자치의회는 1715년 세계 최초의 상업용 습선거(濕船渠, 조수에 상관없이 배가 드나들며 짐을 부리거나 할 수 있게 만든 항만 시설) 건설을 위한 입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해상 무역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돛 만드는 직공과 대장장이, 선구(船具) 설비공 등 관련 업종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리버풀은 눈부신 성장을 지속했다. 1801년에 78,000명이던 인구는 1901년에 685,000명으로 늘었다. 자치의회는 리버풀에 시(市)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했으며, 1888년 이 탄원서가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또한 20세기 초에 이르자 리버풀은 ‘대영 제국 제2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리버풀은 경제 불황에 시달렸으나 시 의회는 동(東) 랭커셔 도로와 머지 퀸즈웨이 터널을 건설하는 등 도시 재건에 힘썼다. 머지 퀸스웨이(Mersey queensway) 터널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수중 터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버풀은 유럽 어느 도시보다 심한 폭격을 당해 거의 황폐화되다시피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1,000여 개의 군 수송대가 리버풀로 들어왔으며, 도시는 1941년부터 대서양 전투의 본부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사업이 시작되었고, 1950년대에 이르러 리버풀은 다시 가장 많은 승객이 이동하는 항구가 되었으며, 수입과 수출액 면에서 영국 내에서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항구가 되었다. 오랜 실업과 경기 침체를 딛고 20세기 후반에는 부두 시스템의 재개발로 도시 부활을 모색했다.

    앨버트(Albert) 부두와 왜핑(Wapping) 부두는 관광과 쇼핑의 명소로 새롭게 각광받았으며, 캐닝(Canning)에 새로 설치한 독 게이트(dock gate)는 1980년~1990년대 대형 범선 축제(Tall Ships Festival)와 머지 강 축제를 개최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리버풀은 1960년대 음악 혁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버풀-해양 무역 도시 [Liverpool-Maritime Mercantile City]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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