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마셜 제도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Bikini Atoll Nuclear Test Site]
요약 : 비키니 환초 핵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냉전시대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된 움직임이었다. 미국은 태평양 마셜 제도의 비키니 환초에서 핵실험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지역 주민을 이주시킨 뒤 1946년~1958년에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1952년)을 포함해 총 67회의 핵실험이 실시되었다.
비키니 환초는 핵실험의 위력을 보여 주는 데 대단히 중요하고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증거를 보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곳에는 1946년 실험 당시 석호의 바닥으로 가라앉은 선박과 브라보(Bravo)라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지닌 위력의 7,000배에 해당하는 여러 실험은 비키니 환초의 지질과 자연 환경, 방사능에 노출된 많은 사람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키니 환초는 평화와 세속적인 천국이라는 역설적 이미지에도 역사적으로 핵시대의 새벽을 상징한다. 마셜 제도 최초로 등재된 세계유산이다.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국가 : 마셜 제도(Marshall Islands)
좌표 : N11 35 60,E165 22 50
등재연도 : 2010년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
마셜 군도를 형성하는 환초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이루어졌다. 섬 내부 미크로네시아 인구의 도착과 정착은 기원전 4000년과 기원전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기간에 걸쳐 전통을 형성한 미크로네시아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어업, 과일, 그리고 특히 코코넛 수확을 기반으로 하였다. 마셜 제도라는 이름이 영국인 캡틴 마셜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처럼, 미크로네시아 사람들의 삶은 캡틴 마셜과 같은 16세기~18세기 유럽 탐험가들에게서 약간 영향을 받았다. 최초의 식민지 역사도 19세기 말 독일 보호령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코코넛 농장으도 개발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맹이 일본의 위임 통치를 승인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마셜 섬이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고 생각한 일본은 강력한 군사 기지로 변화시켰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2월, 미국 해군 4만 명이 마셜 군도와 콰절런(Kwajalein) 환초의 전초 기지를 함락시켰다. 그 뒤 미국인들은 마셜 제도를 적군의 점령지로 여겼다. 일본의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1945년 8월 9일)에 투하된 미군의 원자폭탄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식과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이끌었다. 이러한 군사적 행동은 얄타 회담(1945년 2월), 유럽 내 전쟁 종식(1945년 5월), 포츠담 협정(1945년 7월), 유엔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1945년 4월~6월) 등 동맹국들 간의 수많은 동의를 거친 뒤 이루어졌다. 핵무기 사용은 동맹들 간의 균형을 급작스레 변화시켰다.
유엔의 통제 아래 놓인 핵군축 또는 핵 확산 방지는 갑자기 큰 이슈가 되었으며 의견 충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구소련은 우선 핵 군축을 요청한 반면, 원자력 무기를 소지한 유일한 국가인 미국은 핵 확산 방지를 사수하려고 하였다. 이 이슈는 1945년~1946년 겨울에 개최된 모든 국제회의에서 날카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첫 유엔 총회(1946년 1월)에서 큰 논쟁이 되었다. 핵무기를 조절할 힘을 가진 유엔이 그 원리와 원칙을 발표했지만, 미국과 소련은 이 결정을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다. 불신은 오랜 세월 동맹 관계를 이어 오던 국가들의 관계에 주안점이 되었다. 냉전은 서방과 소련 사이에 바로 시작되었다. 1946년 2월의 일본 점령에서 제외된 소련은 곧바로 북한 내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발표하였다. 그해 봄, 막 등장한 두 진영 간의 군사적 긴장감은 전 세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미국 군대는 태평양 외딴섬에서 핵실험 재개를 요청했으며,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의 핵심이었고 여전히 미국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마셜 군도의 북동부 끝자락에 있는 비키니 환초를 선택하였다. 비키니 환초 거주민 1,000여 명은 1946년 3월 근처 롱겔라프(Rongelap) 섬으로 이주되었다. 그 뒤 환초의 주요 섬에서는 지휘 사령부, 화재 통제 벙커 및 병참 설비를 포함해서 필요한 군사 기지를 만들기 위한 준비가 철저하게 이루어졌고, 군인 수만 명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크로스로드(Crossroads)’라는 암호명 아래 비키니 섬에서 이루어진 처음 두 차례의 테스트는 1946년 7월 1일과 25일에 각각 이루어졌다. 이 실험은 수중 폭발(Baker)과 공중 폭발(Able)로 석호의 동쪽 같은 지점에서 이루어졌다. 이 실험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즉, 미국의 강력한 핵 파워를 나타내는 것과 해군 선단 내 핵 폭발의 직접적인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 군 연구 실행이었다.
6·25전쟁(1950년) 전에 이루어진 러시아의 핵무기 개발(1949년) 능력은 냉정의 극화를 이끌었다. 이후 미국인은 거대한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 형태의 열핵무기를 개발하였다. 1952년 10월, ‘아이비 마이크(Ivy Mike)’라는 코드명 아래 비키니 섬에서 첫 수소폭탄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는 10,400㏏의 위력을 지녔으며, 히로시마에 터뜨린 폭탄보다 800배나 더 강력했다. 해당 폭탄은 인간이 만든 최초의 핵융합 반응에 기반을 둔 핵무기 실험으로, 수소의 무거운 동위원소인 듀테륨을 사용했다(그 결과 ‘수소폭탄’으로 명명됨). 미국이 만든 가장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핵실험은 1954년 3월에 이루어졌으며(캐슬 브라보(Castle Bravo) 핵실험, 15,000㏏), 이후 1954년 다른 유사한 위력을 지닌 폭발이 세 번 있었다. 이는 모두 비키니 섬에서 실험되었다.
미군이 실시한 가장 강력한 폭발을 포함해서 1946년 7월부터 1958년 8월까지 총 23차례의 테스트가 비키니 섬에서 있었다. 비키니 환초 서쪽에서 300㎞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에니웨톡(Enewetak) 환초 지대도 1948년~1958년에 핵 실험지로 사용되었다(44차례의 폭발). 비키니 섬 주민은 한 환초에서 다른 환초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롱겔라프 섬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1957년 섬으로 되돌아가도 괜찮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귀환한 주민 중 137명이 세슘과 방사능으로 오염된 작은 섬에서 자란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일본에 투하된 폭탄 2개와 비키니 섬에서 실시한 크로스로드 핵실험으로 떠오른 일련의 상징과 이미지는 국제 여론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핵실험에 대한 의식은 1950년대 미국, 러시아, 영국(1952년부터)이 실시한 수많은 핵실험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들 국가들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뒤부터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다 위로 떠오른 커다란 핵 버섯은 핵폭발과 관련된 보편적인 이미지이다.
일본에서 처음 만든 캐릭터인 괴물 고질라는 바다 괴물로, 핵 공포와 엄청난 파괴력, 무한한 힘을 나타내는 대중 아이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 문화가 국제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두 조각으로 나뉜 수영복 패션이 ‘비키니’라는 이름으로 파리에서 선보였다. 영화감독 존 휴스턴(John Huston)과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등 수많은 예술가가 태평양 내 핵폭발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다.
정책적인 관점에서 볼 때, 냉전시대 공포의 균형은 두 진영이 동등하게 만들어 낸 핵무기 로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소련은 핵실험의 최고 전성기를 맞는 미국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으며, 마침내 50Mt의 빅 이반(Big Ivan) 수소폭탄을 가지고 미국을 앞지르게 되었다(1961년 실험). 이러한 사건은 빠르게 등장한 인류의 핵 시대 과정을 설명해 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은 공식적으로 교전 국가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1945년 핵폭탄 투하를 통한 히로시마 핵실험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비키니 섬에서 다시 핵실험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강력한 반핵 감정이 일어났다. 1954년 캐슬 브라보 핵실험으로 근처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 어선이 방사능에 노출된 사건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마셜 섬 주민의 방사선 노출을 우려하는 국제적인 여론이 제기되었고, 그 뒤 몇몇 회의가 열렸다. 버트런드 러셀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비키니 섬에서 이루어지는 핵실험에 반대하는 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1954년~1955년은 군사적인 핵 능력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변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소수의 전문가만이 항의하던 것이 이제는 국제적 여론으로 확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유엔 기구가 만들어진 시점에서 형성된 핵실험 반대 여론은 그 힘이 커지지 못했지만, 이후 형성된 국제적 여론의 움직임은 핵 긴축과 핵실험의 종말을 가져올 정도로 강력했다. 핵실험의 디지털 시뮬레이션, 새로운 기술 분야 및 군의 진보와 함께 형성된 여론의 압력은 미국 정부가 핵실험 종결을 결정하게 이끌었다(1958년). 이로써 미국은 핵무기 확산 방지 조항을 재가할 수 있도록 다시 외교적 노력을 쏟았으며, 프랑스를 포함한 기타 국가들이 핵클럽에 참여하려고 준비하게 되었다(프랑스의 첫 실험은 1960년이었다).
1967년부터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비키니 섬 주민이 환초로 복귀할 가능성을 연구했으며, 이에 따라 방사선 오염 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이는 1970년대부터 계속해서 실행되는 농작물 생산 프로그램으로 뒷받침된다. 하지만 주민들을 진찰한 결과, 환초와 그 우물로 만들어진 음식물을 섭취함에 따라 높은 레벨의 방사능에 오염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1978년에 지역 주민들을 다시 환초로부터 대피시켰다. 핵실험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셜 섬은 여전히 국제법 관점에서 예외적인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섬에는 여전히 수많은 미군 주둔지가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점차적으로 정상화되었으며, 1990년대에 마침내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키니 환초 핵 실험지 [Bikini Atoll Nuclear Test Site]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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