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재벌 3명이 거쳐간 서울 가회동 집…정도전 집터에선 구설 끊이지 않고…특급호텔에 돌탑이 세워진 까닭은… 신라호텔의 돌탑 (2)

eorks 2023. 4. 8. 15:26

풍수지리(風水地理)

재벌 3명이 거쳐간 서울 가회동 집…정도전 집터에선 구설 끊이지 않고…특급호텔에 돌탑이 세워진 까닭은… 신라호텔의 돌탑 (2)

‘화신산업’의 부도로 1973년 박씨가 몰락하고 15년 뒤인 1988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 집은 그 해 5월 경매를 통해 무역업을 하는 박모씨에게 넘어갔다. 무역업자 박씨는 2000년 2월 16일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에게 이 집을 넘겼다. 당시 ‘좋은 집터’를 구하고 있던 정 명예회장은 그때 돈으로 55억원을 지불하고 이 집을 샀다고 한다. 당시 정 명예회장에게 이 집을 권한 사람은 풍수지리가 유모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이 집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아들인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마찰을 빚으면서 일주일 만에 ‘가회동 177-○번지’를 포기, 원래 살던 청운동으로 돌아간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2001년 3월 21일 타계했다. 이 집의 명의는 부인 변중석 여사에게로 넘어갔다가 2001년 9월 부동산업을 하는 정모씨에게 다시 넘어가 현재까지 그의 소유로 돼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한보그룹 회장을 지낸 정태수(86)씨가 2003년부터 약 2년가량 이 집에 전세를 살았다는 점이다. 당시 전세금은 10억원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태수씨는 사업상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풍수지리나 사주팔자 등 초자연적 요소를 참고해 온 인물로 알려져 호기심은 더욱 커진다. 그는 당시 사업적 재기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박흥식~정주영으로 이어지는 재계 거목들의 거처를 ‘전세로라도’ 고집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실제로 정씨는 자신의 사업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이른바 ‘한보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1980~1990년대 초까지도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의 허름한 사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곳이 자신에게 재물운을 갖다 줬다고 믿었기 때문”이란 것이 주변의 시각이었다. 정씨는 강남 개발 붐이 일었던 1978년 자신이 지은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히트를 치면서 사업 기반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재기를 위해 이 집에 전세를 들어갔다”는 주변의 관측대로 정태수씨는 이 집에 입주한 지 1년 만인 2004년 5월 채권단에 한보철강 입찰 자격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재기의 포부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정씨는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 받은 뒤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

‘화신’의 부도, ‘현대’의 난, ‘한보’의 몰락을 차례로 지켜본 서울 가회동 177-○번지. 이 땅은 우리 재계의 거인들에게 재복(財福)을 갖다 준 길지(吉地)였을까 아닐까.

정도전의 집터
“천자만손할 길지” 궁궐 가까운 종로구청 앞에 터 잡아 국세청도 이 자리… 풍수 고려해 청장실 옮겼다가 구설

지금의 서울 종로구청 앞 수송동~청진동~미국대사관 일대는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1337~1398)의 개인 집터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은 고려 말 형부상서를 지낸 권문세족이었지만 어머니 영천 우씨의 외할머니는 종이었다. 신분제의 모순을 갖고 태어난 그는 ‘세상은 뒤집어져야 한다’는 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었다. 그가 즐겨 읽었던 책은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벌을 줄 수 있다”는 대목이 있는 ‘맹자’였다. 관료가 된 정도전은 1383년 함경도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도 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을 권한다.

▲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에 자리한 국세청. 하지만 이곳에선 최근 20년간 10명의 청장 중 6명이 구속되거나 심각한 구설에 오르는 불미스런 일이 이어졌다.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정도전은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의 자리는 물론 조선의 종묘 사직과 경복궁 등 궁궐의 위치도 그가 정했으며 전각의 이름도 상당수 직접 지었다. 그는 궁궐 가까운 종로에 자신의 집터를 정하면서 “천자만손(千子萬孫)할 길지”라며 누대(累代)에 걸친 영화를 장담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노비 해방을 역설하며 각종 개혁정치를 주도하던 그는 1398년 음력 8월 26일 밤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참수되면서 한(恨) 많은 생을 마쳤다.

정도전 집터의 중앙 어귀, 지금의 수송동 104번지에 자리한 관공서가 국세청이다. 이곳은 최근 20년간 10명의 국세청장 중 무려 6명이 구속되거나 구설에 오르는 불명예를 얻었다.

‘터’가 영향을 미쳤을까. 국세청과 관련된 풍수지리설은 그래서 눈길을 끈다. 원래 국세청장 집무실은 본청 14층에 있었다. 그런데 2008년 5월, 한상률 당시 청장이 12층으로 집무실을 옮기면서 구설이 불거졌다.

공사 이유는 “집무실 화장실에 물이 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론은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건물은 2003년 1월 준공됐다. 따라서 △당시 기준으로 지은 지 5년밖에 안 된 새 건물이란 점 △7억1000만원이 들었다는 국세청 해명과 달리 실제 공사비는 12억원으로 책정됐다는 지적 △여기에 3억원가량의 추가 공사비가 더 편성돼 ‘호화 집무실을 꾸민 것 아니냐’는 의혹 △화장실만 고치면 되지 굳이 집무실을 옮길 필요가 있느냐는 추궁 등이 겹쳐 “국민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국세청은 왜 이런 무리수를 뒀을까. 의문의 시선이 모인 곳은 풍수지리였다. 서울 청담동에서 J역학원을 운영하는 풍수지리가 김모씨가 배경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거액을 받고 재·관계 인사들의 자문에 응해온 인물로 알려졌다. 국세청 안팎에선 “김씨가 국세청을 꼼꼼히 살펴본 뒤 ‘집무실 이전’을 권했고 한상률 당시 청장이 이를 받아들여 공사를 벌였다”는 말이 나왔다.

공사 이후 국세청 12층 청장 집무실의 내부 벽면 한쪽은 외부에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투명 유리로 교체됐다. 당시 국세청은 “투명행정을 펼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후 이 벽엔 대형 블라인드가 설치됐다. 게다가 투명유리는 이 벽면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청와대가 있는 쪽을 향해 북향(北向)으로 대형 통유리창을 내고 그 앞에 집무용 책상을 놓아 의자를 뒤로 돌리면 국세청장이 정면으로 청와대를 바라볼 수 있게 내부 구조를 바꾼 것이다.

원래의 14층 집무실은 청와대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창밖을 바라보면 국세청장이 위에서 아래로 대통령을 내려다보게 돼 있었다. 풍수 논리에 따르면 이는 ‘신하가 임금을 하대(下待)하는 격’이 돼 순리에 어긋나는 역(逆)의 형상이 된다. “역대 청장이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된 것은 풍수가 역으로 흘렀기 때문”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래서였다.

국세청 안팎에선 “청와대와 눈높이가 맞는 12층으로 집무실을 이전한 뒤 수시로 청와대를 바라보며 그 기운을 받으면 국세청장으로서 장수(長壽)하리라는 풍수가의 조언이 있었다”는 말이 은밀히 퍼졌다. 소문이 확산되자 청와대는 내사에 착수했고 일부 언론은 취재에 나섰다. 당시 국세청은 사진촬영을 막기 위해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공사 8개월 만인 2009년 1월 한상률 청장은 ‘인사 청탁’ ‘그림 로비’ 등의 의혹이 불거지면서 퇴진해야 했다. 정도전의 한(恨)이 5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악영향을 끼친 것일까.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