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유치환(柳致環)님의 詩

eorks 2007. 5. 3. 00:02

유치환(柳致環)님의

    1.<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2.<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3.<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4.<광야(曠野)에 와서>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 5. - 행복(幸福)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6. - 생명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여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7.<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 8. - 춘신(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 유치환 : (柳致環,1908~1967) 호는 청마(靑馬). 경남 통영 출생. 연희 전문학교 수학.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 표하여 문단에 데뷔. 초기에는 낭만적, 상징적 경향을 보이다가 후기에는 인간의 생 자체에 관심을 가짐으로 써 서정주와 더불어 생명파 시인으로 불리운다. 시집으로는 <청마시초>(1939),<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1951),<청마시집>(1954),<제 9시집> (1957) 등 다수가 있으며 우리 시단에서 가장 많은 작품 을 제작해 낸 시인으로 손꼽혔다.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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