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이시영님의 詩

eorks 2007. 5. 3. 15:25

이시영님의

    1.<어머니> 어머니 이 높고 높은 아파트 꼭대기에서 조심조심 살아가시는 당신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죽어도 이곳으론 이사 오지 않겠다고 봉천동 산마루에서 버티시던 게 벌써 삼년 전인가요 ? 덜컥거리며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에 아직도 더럭 겁이 나지만 안경 쓴 아들 내외가 다급히 출근하고 나면 아침마다 손주년 유치원길을 손목 잡고 바래다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하루 일거리 파출부가 와서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가고 요구르트 아줌마가 외치고 가고 계단청소 하는 아줌마가 탁탁 쓸고 가버리면 무덤처럼 고요한 14층 7호 당신은 창을 열고 숨을 쉬어보지만 저 낯선 하늘 구름조각 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허리 펴고 일을 해보려 해도 먹던 밥 치우는 것말고는 없어 어디 나가 걸어보려 해도 깨끗한 낭하 아래론 까마득한 낭떠러지 말 붙일 사람도 걸어볼 사람도 아예 없는 격절의 숨막힌 공간 철컥거리다간 꽝 하고 닫히는 철문 소리 어머니 차라리 창문을 닫으세요 그리고 눈을 감고 당신이 지나쳐온 수많은 자죽 그 갈림길마다 흘린 피눈물들을 기억하세요 없는 집 농사꾼의 맏딸로 태어나 광주 종방의 방직여공이 되었던 게 추운 열여덟 살 겨울이었지요 ? 이 틀 저 틀로 옮겨 다니며 먼지구덕에서 전쟁물자를 짜다 해방이 되어 돌아와 보니 시집이라 보내준 것이 마름집 병신아들 그 길로 내차고 타향을 떠돌다 손 귀한 어는 양반집 후살이로 들어가 다 잃고 서른이 되어서야 저를 낳았다지요 인공 때는 밤짐을 이고 끌려갔다 하마터면 영 돌아오지 못했을 어머니 죽창으로 당하고 양총으로 당한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요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에게 밥해주고 밤사람이 들어오면 밤사람에게 밥해주고 이리 뺏기고 저리 뺏기고 쑥국새 울음 들으며 송피를 벗겨 저를 키우셨다지요 모진 세월도 가고 들판에 벼이삭이 자라오르면 처녀적 공장노래 흥얼거리며 이 논 저 논에 파묻혀 초벌 만벌 상일꾼처럼 일하다 끙 달을 이고 돌아오셨지요 비가 오면 덕석걷이, 타작때면 홀태앗이 누에 철엔 뽕걷이, 풀짐철엔 먼 산 가기 여름 내내 삼삼기, 겨우내내 무명잣기 씨 뿌릴 땐 망태메기, 땅 고를 땐 가래잡기 억세고 거칠다고 아버지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머슴들 속에 서면 머슴 밭고랑에 엎드리면 여름 흙내음 물씬 나던 아 좋았던 어머니 그 너른 들 다 팔고 고향을 아주 떠나올 땐 몇번씩이나 뒤돌아보며 눈물 훔치시며 나 죽으면 저 일하던 진새미밭 가에 묻어 달라고 다짐 다짐 하시더니 오늘은 이 도시 고층아파트의 꼭대기가 당신을 새처럼 가둘 줄이야 어찌 아셨겠습니까 엘리베이터가 무겁게 열리고 닫히고 어두운 복도 끝에 아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면 오늘도 구석방 조그만 창을 닫고 조심조심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는 흰 머리 파뿌리 같은 늙으신 어머니 ------------------------------------------------------- 2.<정님이>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 이시영 : (1949 ~ ) 전남 구례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월간문학』신인 상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76년 첫시집 <만월> 간행한 이후 <바람속으로>, <길은 멀다 친구여>,<이슬 맺힌 노래>등을 냄.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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