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렴무렴명(眞廉無廉名) 입명자 정소이위탐(立名者 正所以爲貪) 대교무교술(大巧無巧術) 용술자 내소이위졸(用術者 乃所以爲拙) 참으로 청렴함에는 청렴하다는 이름조차 없으니 그런 이름을 얻 으려는 것부터가 바로 그 이름을 탐욕함이다. 참으로 큰 재주가 있 는 사람은 별스러운 재주를 쓰지 않으니 교묘한 재주를 부리는 사 람은 곧 졸렬함이다. 홍자성의 <채근담>에 전하는 말이다. 진짜 청렴한 사람은 청 렴하다는 소문을 내지 않는다. 청렴을 강조하고 다니는 사람은 실은 명예욕이 강한 사람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들이 깜짝 놀랄 만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함부로 그 재주를 자랑하 지 않는다. 재주를 자랑하는 사람은 그 재주가 미숙하다는 것 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은 잔재주를 뽐내고 티끌 같은 청렴함을 드러내 보이 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음은 청렴결백했던 역사상 `진짜 선 비들`의 얘기다. 후한시대는 환관들이 많아 관료 사회 전반이 부패했지만, 그 중에는 고결한 관리도 없지 않았다. 제6대의 안제(安帝) 때의 양진(楊震)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양진은 대단히 박학 하고 청렴결백한 인물이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관서 의 공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양진이 동래군(東萊郡)의 태수로 임명되었을 때의 일이다. 부임 도중 창읍이라는 곳에서 자게 되었는데, 밤늦게 창읍현의 현령 왕밀(王密)이 남모르게 찾아왔다. "태수님 참 반갑습니다. 형주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왕밀이 올시다." "아, 참 오랜만일세." 양진은 왕밀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찍이 형주의 자사를 지내 고 있을 무렵, 그 학식을 알아보고 관리 시험에 수재로 합격시 켜준 사나이었다. 두 사람은 지난날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왕밀이 품에서 금 열 근을 꺼내 놓았다. 양진에게 주려는 것이 었다. 그러나 양진은 부끄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받기를 거절 했다. "나는 전부터 그대의 학식이나 인물을 잘 알고 있네, 그런데 그대는 내가 어떤 인물인지를 잊어 버렸는가?" "아닙니다. 태수님, 태수님이 얼마나 고결한 분인가를 마음 속에 뚜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슨 뇌물이 아닙니다. 다만 전에 은혜를 입은 데 대한 감사의 뜻르로 드리 는 것입니다. "자네는 내가 미리 짐작한 대로 훌륭하게 성장을 하여 현령 이 되었네, 앞으로 더 영전을 해서 세상을 위해 일해 줄 것으로 믿네, 나에 대한 은혜는 그것으로 갚아지는 게 아니겠는가." "아니올시다, 태수님. 그렇게 딱딱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 다. 그리고 지금은 깊은 밤입니다. 또 여기에는 저와 태수님뿐 이라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양진은 조용히 눈으로 완밀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아무도 모른다고 할 수 수는 없겠지, 우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네. 게다가 자네도 알고 나도 알고 있지 않는가?" 이 말에 왕밀은 얼굴을 붉히고 돌아갔는데, 그 후 양진의 고 결함은 날로 더 빛이 나서 드디어 태위(병사의 최고관리)가 되 었다. <후한서> `양진전(楊震傳)`, <십팔사략> `동양, 효안황 제`편에 전해지는 얘기다. 다음은 후한(後漢) 제7대 순제(順帝) 때 소장(蘇章)이란 인물 에 대한 얘기다. 당시 조정은 황후의 형제들인 양(梁)씨와 내 시들의 손에 의해 마음대로 움직여지고 있었다. 나라의 정치는 그야말로 한껏 부패했다. 그러나 지방에는 간혹 유능하고 청빈 한 관리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기주(冀州)의 장관으로 있는 소장(蘇章)은 관내를 순시하던 길에 청하군(淸河郡)이라는 곳에 갔다. 그곳 태수는 옛날부터 의 친구였다. 옛 친구이며 지금은 상관인 소장이 자기 고을에 들른다는 소문을 듣고 태수는 크게 잔치 준비를 하고 장관을 환대했다. 그리고 술이 몇 순배 돌아갔을 때 태수는 소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은 하늘이 하나밖에 없지만 나에게는 하늘이 둘이 라네. 옛 친구이자 상관인 자네가 순찰을 왔으니 웬만한 일은 눈감아 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소장은 낯빛을 바꾸고 꾸짖듯 말했다. "지금 내가 자네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것은 옛 친구로서 마시는 것이네, 그러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정이고 내 일은 장관의 자격으로 감사를 할 것이네. 공과 사를 혼동해서 는 안 되네." 이튼날 소장은 태수가 한 일을 샅샅이 조사하여 부정을 적발 해서 법에 정한 대로 처리를 했다. 이렇게 꼿꼿하고 청렴한 관 리도 있었지만, 조정은 여전히 외척과 내시들 때문에 나라꼴이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이 역시 <후한서(後漢書)>에 전하 는 얘기다. 궁자후이 박책어인(躬自厚而 薄責於人) 공자가 말했다. "자기의 잘못은 엄히 다스리고,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봐주는 것 이야말로 원망을 멀리하고 사람을 쉽게 따르게 하는 지름길이다." 자기 스스로에게는 엄하게 행하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 서해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잘못이나 자식의 잘 못에는 너그러우나, 남의 잘못이나 남의 자식이 잘못했을 때에 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공자의 말씀대 로 행하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옛 선비들 중에 공자의 격언대로 행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황희 정 승이다. 그는 자신의 집 뜰 배나무에 열린 배를 마을 개구쟁이 들이 아무리 따먹어도 큰소리 한 번 친 적이 없을 정도로 너그 러웠지만 자신의 자식들은 엄하게 가르쳤다. 그는 기생집에 들락거리는 작은아들에게 아비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손님이라며 손님 대접을 함으로써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또한 출세를 하여 큰 잔치를 연 큰아 들에게는, "선비가 청렴하여 비가 새는 집에서 살아도 나라가 부강해질 까 말까 한데 너는 조그마한 벼슬 한 자리 얻고 궁궐 같은 집에 서 잔치를 여니 내 아들도 아니다." 라고 매섭게 호통을 쳐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황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청백리의 표상인데 고래로부 터 황희 못지않은 청백리에 대한 역사 기록이 매우 많다. 먼저 <명심보감> `염의(廉義)`편에 실려 있는 인관가 서조라 는 인물이다. 신라 때 인관이라는 사람이 장에서 솜을 파는데 서조(署調) 라는 사람이 곡식을 주고 솜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솔개가 그 솜을 채다가 인관의 집에 떨어뜨렸다. 이에 인관이 서조에게 솜을 돌려보내고 말하기를, "솔개가 당신의 솜을 내 집에 떨어뜨렸기에 돌려보냄니다." 하였다. 그러자 서조가 말하기를, "솔개가 솜을 채다가 귀하에게 준 것은 하늘의 뜻이니 내 어 찌 받을 수 있겠소." 하였다. 다시 인관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이 지불한 곡식을 돌려보내리라." 서조가 말하기를, "내 귀하에게 솜 값을 지불하고 벌써 장이 두 번이나 지났으 니 그 곡식은 이미 귀하의 것이오." 그렇게 서로 사양하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솜과 곡식을 함 께 장터에 내다 버렸다. 이에 장터를 다스리는 관리가 그 사실 을 임금에게 고하자 임금은 그 둘에게 함께 벼슬을 내렸다. 한편, 관리들이 뇌물을 받는 못된 습관은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 같다. 다음은 부패한 관리들에게 일침이 될 만한 청백리 (淸白吏) 이야기이다. 고려 충렬왕 때의 일이다. 순천 부사 최석(崔錫)이라는 사람 이 있었다. 그는 청렴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비서랑(秘書郞)이 되어 서울로 돌아갈 때 일이다. 당시 순천에는 벼슬을 얻어 서울로 전근 가는 사람에게는 좋은 말을 여덟 마리씩 주 어 보내는 풍속이 있었다. 해서 지방 관리들이 말들을 끌고 와 서 좋은 말을 고르라고 했는데 최석은 아무 말이나 골라서 짐 을 실었다. 그리고 서울에 무사히 도착한 뒤 이제 말들이 할 일 은 모두 끝났다며 순천으로 모두 돌려보냈다. 최석이 서울로 올라갈 때 끌고 간 말은 여덟 마리였는데 순천 사람들이 되돌려 받은 말은 망아지 한 마리를 포함하여 모두 아홉 마리였다. 이상하게 여긴 관리들이 망아지 등에 꽂힌 편 지를 집어 펼쳤더니 거기에 `이 망아지는 내가 서울로 가던 도 중에 낳은 새끼로, 분명 내가 순천에 있을 때 어미 말이 임신을 했을 터이니 아울러 돌려보낸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순천 백성들은 하늘이 주신 청백리라면서 최석을 위해 송덕비를 세 웠다. 그 비가 `팔마비(八馬碑)`다. 황희 정승과 동시대인 조선 세종 때의 명신 유관(柳寬)이란 인물도 빼놓을 수 없겠다.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 청 렴결백하기로 이름이 났다. 그는 원래 청빈함을 평생 팔자로 알고 그저 가난을 잊고 살았다. 장마가 지는 여름철이면 지붕 이 새서 마치 삼대가 죽죽 뻗은 것같이 비가 내려도 이를 맏을 재주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산을 들고 방안에 쪼그리고 앉 아서는 비를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는 부인을 향해 이 렇게 큰소리를 친다.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지낼까? 우리는 이만하면 다 행한 일이 아니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반드시 지붕이 새지 않도록 강구했을 게 아닙니까." 부인의 입바른 소리에 아무 말 못 할밖에. 그는 집에 찿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맨 발로 나가서 맞아들였고, 이따금 자신이 직접 채마밭에 나가 호미로 김을 매곤 하였다. 불평 한 마디 없이. 조선 말엽 사람으로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벼슬이 판 서(判書)에 이르렀던 홍기섭(洪基燮), 그는 젊었을 때 말할 수 없이 가난했다. 어느 날 아침 어린 계 집종이 기쁜 듯이 뛰어와서 돈 일곱 냥을 바치며 말했다. "이것이 솥 속에 있었습니다. 이 돈이면 쌀이 몇 섬이요, 나 무가 몇 바리입니다.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것입니다." 홍기섭이 놀래서 묻 기를, "이것이 어찌된 돈인고?" 하고 곧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와서 찿아가라`는 글을 써서 대 문에 붙였다. 이윽고 얼마 아니 되어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찿아와 글의 뜻을 물었다. 홍기섭이 빠짐없이 사연을 들려주었다. 사연을 듣고 난 유가가 물었다. "남의 솥 속에다 돈을 잃어버릴 리가 없습니다. 참으로 하늘 이 주신 것인데 왜 취하지 않으십니까?" 홍기섭이 답했다. "내 물건이 아닌데 어찌 가지겠는가." 유가가 꿇어 엎드리며 말했다. "사실은 소인이 어젯밤 솥을 훔치러 왔다가 도리어 가세(家勢)가 너무 쓸쓸한 것을 불쌍히 여겨 이 돈을 놓고 갔습니다. 이제 공의 성정이 고결하고 탐심이 없으며 마음이 깨끗한 것에 탄복하였습니다. 좋은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 앞으로는 절대 도 둑질 아니 할 것을 맹세하옵니다. 늘 옆에서 모시기를 원하 오니 걱정 마시고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공이 돈을 돌려주며, "자네가 좋은 사람이 된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나 이 돈은 취 할 수 없네." 하고 끝끝내 받지 않았다. 뒤에 홍기섭은 판서가 되고 그의 아들 재룡(在龍)이 헌종의 (憲宗) 부원군이 되었으며, 유가도 또한 신임을 얻어서 몸과 집 안이 크게 번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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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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