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李廣)은 한나라의 성기인(成紀人)이다. 문제(文帝) 때에 흉노를 토벌하여 공을 세워서 상시(常侍)가 되고, 활을 잘 쏘아 서 흉노가 두려워하여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 한 번은 이광이 사냥을 나가서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 하고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신념으로 활을 당겼다. 화살은 명 중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끄덕도 아니하므로 가서 본즉 돌이었 다. 그리하여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쏘아보았으나 끝내 화살 촉이 돌에 박히지 않았다. 정신이 한군데로 모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화에서 유래한 말이 `사석위호(射石爲虎)`다. 성심을 다 하면 아니 될 일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이광은 자기가 부임한 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들으 면 언제나 자신이 직접 쏘아 잡았다. 우북평군으로 부임하면서 도 호랑이를 쏘았는데, 호랑이가 달려들어 이광에게 상처를 입 혔으나 결국은 그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적을 만나면 용감하 고, 사졸들에게는 인애(仁愛)로우며, 호령은 명쾌하여 부하 장 졸(將卒)들이 감복했다. 그는 뒤에 대장군 위청(衛靑)을 따라 흉노를 치게 되었다. 이 광의 부서는 전위장군(前衛將軍)이었는데, 위청은 이광이 연로 하고 불운하다는 이유로 선우와 맞서게 해 주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원한과 분노를 품은 채 출발했으나 안내자가 없어 헤매 다가 길을 잃고 대장군과 합류할 시간에 늦었다. 막부(幕府)에 서 조사를 하게 되자 이광은 부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소시 때부터 흉노와 대소 70여 전을 겪었다. 이번에 다 행히 대장군과 출격해서 접전하려 했는데 대장군이 나의 부서 를 옮겨 먼 길을 우회케 되어 길을 잃게 되었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 그는 결국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비장하면서도 장쾌한 삶 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훗날 사마천은 <사기> `이장군전(李將軍傳)`에서 이렇게 쓰 고 있다. "이광은 키가 크고 원비(猿臂)였다. 그가 활을 잘 쏜 것도 또 한 천성이다." 원비라 함은 원숭이처럼 팔이 길다는 말이다. 원숭이처럼 팔 이 길면 활을 당겨 쏘기에 대단히 유리할 것이므로 이런 이야 기가 전해지는 것 같다. 비슷한 이야기가 <한시외전(韓詩外專)>에 전한다. 초(楚)나 라의 웅거자(熊渠子)란 사람이 역시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 이 화살 깃까지 묻힐 정도로 돌에 깊이 박혔다(→사석음우(射石飮羽))는 이야기다.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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