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때 교현(橋玄)이라는 인물은 청렴결백하고 강직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매사에 공명정대하여 관직에 있을 때 부하의 잘못을 눈감아주는 일이 없었으며, 아무리 고관대작이라고 햬 도 비리가 발견되면 처벌을 상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교현의 어린 아들이 강도들에게 붙잡혀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교현 수하의 장수가 즉시 병사를 이끌고 구출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병사들은 상관의 어린 아들이 다칠 것을 우 려하여 포위만 하고 있을 뿐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이에 교 현이 호통을 쳤다. "세상을 어지럽히며 날뛰는 무리들을 앞에 두고 어찌 사사로 이 아들의 안위를 돌보고자 한단 말인가" 교현의 질타에 병사들이 손을 써 강도들을 모두 붙잡았으나 교현의 어린 아들은 그만 살해되고 말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도 교현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백 번 꺽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고, 큰 절개에 임하여서는 빼앗을 수 없는 풍모를 지녔다(유백절불요 임대절이불가탈지 풍 ; 有百折不搖 臨大節而不可奪之風)" 훗날 채웅은 `태위교공비(太尉喬功碑)`라는 비문을 지어 교 현의 인품을 칭송했다. 여기서 유래하여 백절불요는 어떠한 어 려움에도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뜻하는 고사성어로 쓰 이게 되었다. 비슥한 성품을 성품으로 전한(前漢) 성제(成帝) 때 왕상(王商)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어느 해 장안(長安)에 홍수가 들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성제는 대책을 세우기 위해 중신들을 소집하 여 의견을 물었다. 성제의 장인인 완봉(王鳳)은 조사도 해보지 않고 시급히 피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상만은 헛소문이 라며 끝까지 반대했다. 이후 헛소문임이 드러났고 성제는 왕상 을 신임하게 되었다. 그런 왕상을 왕봉은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또 어느 날 이번에는 왕봉의 일족인 양융이라는 인물이 크게 실정 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왕봉이 선처를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상은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양융은 파면되었다. 후한의 사가 반고(班固)는 자신의 저서 <한서>에서 왕상의 인품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왕상의 사람 됨됨이는 질박하고 성격은 불요불굴(不搖不屈)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주위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 게 되었다." 특히 공직에 있는 사람이 성품이 강직하여 공명정대한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을 때 `불요불굴`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바로 왕상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백두대간^^........白頭大幹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