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이야기

학문을 성취하려면

eorks 2013. 10. 25. 08:32

고전(古典) 이야기 ~수련과 성찰~

학문을 성취하려면
무작정 책장만 넘긴다고 해서 학문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공부하는 데도 다 방법이 있다는 얘기다. 학문을 함에 있어 선현들은 어떤 점에 유의를 했을 까? 먼저, <열자(列子)> `탕문 (湯問)`에 있는 조언이다.

양궁지자 필행위기 양야지자 필선위구
(良弓之子 必行爲箕 良冶之子 必先爲裘)
좋은 활을 만드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삼태기 엮는 일부터 익히고, 좋은 대장장이는 반드시 먼저 가죽옷 만드는 일부터 한다.

활은 탄력이 좋아야 화살이 멀리까지 나간다. 활의 탄력을 유 지하기 위해서는 물푸레나무와 물소 뿔을 잘 다듬어 붙이고 잡 아 휘어야 한다. 싸리나무 가지를 휘어 삼태기를 엮는 일은 바 로 그러한 솜씨를 익히는 데 있어서 좋은 기초 훈련 과정이 된 다. 대장장이는 딱딱한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여러 가지 모양 의 도구를 만든다. 쇠붙이를 두들겨 펴고 휘고 자르는 데 있어 서는 가죽옷 만드는 일이 좋은 기초 훈련 과정이 된다. 즉, 기초 가 단단해야 학문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얘기다.
다음은 <묵자(墨子)> `상동(尙同)`편에 있는 말이다.

조기시청자중 즉기소문견자원의
(助己視聽者衆 則其所聞見者遠矣)
자기를 도와서 보고 듣는 사람이 많으면 자기가 듣고 보는 범위가 그만큼 원대해진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각종 정보 매체를 잘 활용하라는 얘기다. 아니면 혼자 공부하기보다는 스터디 그룹 같은 걸 만들어서 서 로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라는 얘기다. 세상은 넓고 쉴 새 없 이 변하고 발전한다. 한사람이 그 넓은 세상을 두루 다 다닐 수 없고, 또 그 많은 일들을 빼놓지 않고 고루 다 보고 들을 수 없 다. 따라서 보다 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보다 많은 일들을 알 기 위해선 자기를 대신해 그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고 자기를 대신해 그 많은 일들을 보고 들어주는 무엇인가가 필요할 것이 기 때문이다.
한편, 현장 학습을 강조하기도 한다. 청나라 묘연(묘燕)이 `답소사서(答小謝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무자서자 천지만물시야 고인상취지부진
(無字書者 天地萬物是也 古人嘗取之不盡)
이상류어천지간 일재목전이인부지독
(而尙留於天地間 日在目前而人不知讀)
글자가 없는 책이 있으니 천지만물이 바로 그것이다. 옛사람이 이 를 취했으나 다 없어지지 않고 아직도 하늘고 땅 사이에 남아 있으 며, 날마다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읽을 줄 모른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글자를 익히고, 글자로 적힌 책을 읽고 지혜와 지식을 쌓아 나간다. 그러나 문자로 기록되거나 저술된 책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나 지식은 천지만물, 즉 자연을 통해 배우고 익히는 지혜나 지식에 미치지 못하며 불완전하다. 자연 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눈 뜬 장님이라 할 것이다. 학자라면 모름지기 세상의 이치를 득해야지 먹물만 가득 찬 책 상물림이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현장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구가 또 있다. 한나라 유향 (劉向)이 <설원정리(說苑政理)>에서 한 말이다.

이문불여목견 목견불여족천지(耳聞不如目見 目見不如足踐之)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눈으로 보는 것은 발로 직접 찾아가 보는 것만 못하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는 말이다. <한서> `조총국전(趙充國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한나라 선제(宣帝) 때 서북방에 사는 티베트계 유목민이 반 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강(羌)의 선령(先零)이라는 한 종족 이 황수(湟水) 북쪽에서 유목하는 것을 허락 받고 있었다 그 들은 풀을 따라 남쪽 물가에까지 이르렀는데, 정벌군으로 나온 한나라 장군이 갑자기 선령의 중요한 사람 천여 명을 죽였다. 선령은 크게 노하여 한군으로 쳐들어갔는데, 그 세력이 대단하 여 한군은 크게 패해 쫓겨 갔다.
이때 선제는 어사대부(御史大夫) 병길(丙吉)을 후장군(後將軍) 조충국(趙充國)에게로 보내 누구를 토벌군 대장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를 묻게 했다.
조충국은 그때 이미 나이 70을 넘은 사람이었다. 그는 젊을 때부터 흉노와의 전쟁에서 활약해 왔었다. 무제 때 이사장군 (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 밑에서 원정했다가 흉노의 군세가 강하여 전군이 포위를 당했었는데, 먹을 것도 없이 사상자가 많았다. 그때 충국은 백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돌진하여 몸 에 20여 군데나 상처를 입으면서도 기어이 포위망을 뚫어 전군 을 구해 냈었다.
그때 무제는 그 상처를 보고 놀라며 그를 동기장군(東驥將軍)에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그의 대(對)흉노, 대(對)강의 생애 가 시작된다. 그는 침착하고 용감하여 큰 계략을 가지고 있는 터라, 확실히 제의 물음을 받을 만한 임물이었다.
그는 선제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 노신(老臣)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 줄 아옵니다."
선제는 불러 다시 물었다.
"장군이 강을 친다 하면 어떤 계략을 쓰겠으며, 얼마만큼 군 대를 쓸 것인지 말해 보오."
조충국은 대답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대저 군사 의 일은 실제로 보지 않고 먼 곳에서 계량하기 어려운 것이기 에, 원컨대 금성군(金城郡)에 가서 도면을 놓고 방책을 세우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선제는 빙긋이 웃으며 그의 청을 들어 주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란 말은 여기 나온 것이 최초라 한단. 대 개 민간의 속담이었을 것이요, 널리 쓰이는 말이다. 서양에서 도 `열의 소문보다 하나의 증거`라는 말이 있다.
조충국은 금성에 가서 상세히 정세를 살핀 후에 이윽고 둔전 (屯田)이 상책이라고 제에게 상주했다. 기병을 그만두고 보병 일만여 명만을 남겨 이들을 각지에 분산시켜, 평소에는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다. 이 계획은 채용되어 조충국은 거의 1년 동안 그 땅에 머물러 있었으며 드디어는 강의 반란을 진압하였다고 한다.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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