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 장승업 만큼 술을 즐기고 술
의 포로가 되어 한 평생을 취생몽사(醉生夢死)격으로 지낸 사람
은 없을 것이다. 그는 오십 평생을 거의 매일과 같이 술 속에 파
묻혀 지내다가 술 속에 거꾸러져 간 사람이다.
한때 고종 황제(高宗皇帝)의 지우(知遇)를 얻어, 좋은 그림을
그려 바치기만 하면, 영달의 길이 눈 앞에 있었건만, 그는 헌 신
짝처럼 그것을 포기한 사람이었으니, 예술가에겐 벼슬이 필요하
지 않다는 그의 인생관의 허무주의(虛無主義)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 시대 말엽(末葉) 고종 때의 사람으로 그의 조상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무반(武班) 출신의 후예였던 것만
은 사실인 듯 하다. 그는 어렸을 때 양친을 잃고 천애의 고아가
되어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떠돌다가 나이 이십이 되자 서울에 와서 어
디엔가 정착(定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침 서울 수표교(水標橋) 근방에 이응헌(李應憲)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독서와 그림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동지(同
知)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기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이 동지라고
불렀다. 이 동지는 실로 우연한 기회에 장승업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으므로, 처음으로 장승업을 보는 순간
그의 뛰어난 상모(相貌)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승업의
방랑을 중지시킨 사람이었으니 승업이 이 동지의 집 식구가 되었
기 때문이다.
나이 이십이 되도록 글 한 자도 배우지 못했던 승업은 이 동지
집의 이 일 저 일을 보살피면서, 그의 아들이 글 배우는 것을 어
께 너머로 구경하면서 글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글
에 점점 더 열중하게 되었고 글자도 제법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 이 동지는 상당히 부유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서
화 골동(書畵骨董)의 수집가였다. 그의 집에는 상당한 양의 고대
중국 서화와 골동이 비장되어 있었다. 원(元)과 명(明)나라의 일
류 화가의 것도, 국내의 것도 삼원(三圓)의 것이 대개 갖추어 있
었다.
한 번 그림들을 보고 난 승업은 가슴 속에서 갑자기 치솟는
야릇한 의식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붓을 들어 그림을 한
번 그려 보기로 했다. 자기도 그만큼은 그릴 수가 있을 것만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같은 생각은 놀랍게도 틀리지 않았다. 한
번도 잡아 보지 않은 화필이었지만 그것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
럼 유연히 미끄러졌다.
매란(梅蘭)을 위시하여 산수화(山水畵) 영모 등을 그려 보았는
데 그 필치가 대가의 것을 능가할 만 했다. 첫 솜씨가 그리하였
다. 그는 실로 신운(神韻)이 횡일하는 천재 화가였던 것이다. 어
느 날 주인 이 동지가 장승업의 그린 그림을 발견하고 물었다.
"이것이 네가 그린 그림이냐?"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그림을 배웠느냐?"
"그림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마는 한 번 그려 보고 싶어서 붓을
놀렸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너는 천재 화가다. 이제부터 뜻을 그림에 두고 열심히 공부해
라. 지필묵 등 화구(畵具)는 내가 마련해 주마."
그 때부터 장승업은 매일같이 그림만 그렸다. 워낙 그림에 천
재적인 소질을 갖춘 그였으므로 그의 그림은 일취 월장했다. 그
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대화가
(大畵家)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스승 없이 그리기 시작한 그림
이었지만 그의 그림은 천의무봉(天衣無縫)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는 그림을 잘 그리기는 하였으나 술을 너무나 좋아했
다. 매일 장취…… 술과 장승업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가 되고 말았다.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열 잔이 되고 됫술
이 말술로, 말술이 다시 섬 술로 변해 간 것이었다. 하루에 삼백
잔을 기울렸다는 이태백을 따를만 하였다.
그는 그처럼 통음(痛飮)하기만 했기에, 제법 큰 그림을 한 번
완성하려고 하면 몇 해가 걸리는 수도 있었다. 몇 해가 걸려도
완성되지 못하는 수도 있었다. 그는 그림값이 후하게 들어오면
우선 술집에다 그 돈을 맡겼다. 그리곤 무한정하고 술을 즐겼다.
그리하여 한 평생을 주채(酒債)에 신음하다가 오십여 세에 세상
을 떠나고 말았다.
[다음 날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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