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어서……]
동고 상공의 이러한 행동은 온 집안뿐 아니라 당사자인 피씨
일가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을 보았는지 동고는 총각이
결혼을 승낙한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며 즉시 피씨에게 명했다.
"내일 안으로 곧 대례를 지내도록 해라."
"그렇게 급하게야 할 수 있습니까."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하는 소리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 뺏기게 될 것이니까 그렇게 해
야 한다."
피씨가 머뭇거리자 동고는 그런 생각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다시
말했다.
"내가 범연히 고른 것이 아니야. 내 말대로 하기만 하면 아무
일 없을 테니 그리 알아라."
동고 이준경의 범연치 않음을 아는 피씨 또한 피할 길이 없는
지라 그대로 그 이튼날 대례를 지내고 말았다. 목욕시키고 새 옷
을 갈아입히니 거지 총각의 모습은 옷이 날개여서 그런지 그만하
면 훌륭했다.
여러 사람들은
"거지 총각 꿈도 잘 꾸었다."
하고 말했지만 피씨의 딸은 은근히 동고 대감을 원망했다.
"어디 시집갈 데가 없어서 거지 총각에게 간담."
그러나 모두 팔자 소관이니 생각하고 그냥 삭혀 버리고 말았
다.
장가든 총각은 그 날부터 세수를 하는 적도 없었고, 아무런 일
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 세 끼 밥을 축낼 뿐이었다. 그리고는
밤과 낮의 분별도 없이 매일 잠만 자는 것이었다.
때문에 동리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그를 비웃었다.
"거지 노릇을 할 때야 수족을 빨리 놀리지 않으면 밥을 얻어
먹지 못하지만 이제 편안히 앉아 있으니 잠자는 일 이에 할 것이
있겠는가. 본시 거지란 것은 게으르고 잠만 자는 것이 특성이니
까."
피씨와 그의 부인과 딸은 그런 풍문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웃 사람들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피씨 사
위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간에 그냥 잠만 자는 것이 유일한 일과
였다.
그 동안 삼 년이란 세월이 물결처럼 흘렀으나 피씨 사위는 변
함없이 낮잠만을 자는 것이 능사였다. 그리고 먹고 대문 밖을 나
서는 일이 또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그는 부리나케 일찍 일어나더니
처음으로 세수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는 집 안을 청소했다. 집
안 사람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 년 만에 비로소 잠이 깬 모양이다."
아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에게 물었다.
"웬일이세요?"
"응, 오늘은 동고 대감께서 우리 집에 행차하실 거야. 나를 찾
아오실 테니까."
집안 사람들은 모두 미치광이의 말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과연 벽제 소리를 요란히 울리며
동고 대감이 피씨의 집 앞에 나타났다. 집안 식구가 모두 놀라며
상공을 맞았다. 피씨 사위는 특히 공손하게 이준경을 맞이하고
있었다.
동고 대감은 피씨 사위의 손을 잡고 추연한 안색을 감추지 않
은 채 물었다.
"장차 어찌할 것인가."
"천운이니 할 수 있습니까."
"그래 그럴 거야. 뒷일은 모두 자네가 처리할 것으로 믿고 갈
테니 그리 알게."
"소인이 대감의 은고를 입음이 이렇듯 크온데 어찌 분부를 저
버리겠습니까. 장차 사세를 선처할까 하옵나이다."
"자네만 믿고 나는 가네."
동고는 피씨 사위와 이별하고 돌아갔다.
그 집에서는 그 날부터 당장 사위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동
고 대감이 온다는 말도 맞았고 더욱이 동고 대감이 무슨 일인지
그에게 부탁하고 갔다는 것이 그 집 사람들의 이목을 현황케 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우리 사위는 범연한 인물이 아니야.`
하고 생각한 피씨는 동고 대감을 배웅하고 돌아와서
"오늘부터는 사위와 더불어 정담을 주고 받아야겠다."
하면서 사위의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사위가 말했
다.
"장인, 의관 벗을 것 없습니다. 지금 당장 동고 대감 댁에 가
보십시오."
"방금 그 집에서 오는 길인데!"
"그래도 지금 빨리 가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동고 대감이 지금 바로 운명하시게 되었습니다."
"내가 올 때 아무렇지도 않으셨는데……"
"글쎄 지금 야단이 났으니 빨리 가 보십시오."
피씨가 크게 놀라며 달려갔더니 동고 대감 집에는 과연 큰 일
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녀 비복들이 들끊고 의원이 왔다 갔다 하
고 있었다. 피씨는 동고 대감의 베갯머리까지 들어갔다.
"웬일로 다시 왔는고?"
"사위놈이 빨리 가 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갑작스레 웬일이십
니까?"
피씨가 말하자 동고 이준경은,
"응, 자네의 사위야말로 별다른 인물이니 내가 없을 지라도 그
의 말을 순종하도록 하여라."
하고 말한 뒤에 고요히 숨져 갔다. 때는 선조 5년 7월 7일이었다.
74세를 일기로 하여 동고는 떠났다.
그 후부터 피씨 일가는 그 사위를 여불 대우(如佛待遇)하게 되
었다. 삼 년 동안의 구박과 학대가 씻은 듯이 없어진 것이다. 동
고 상공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을 피씨는 늦게서야 알게 된 것이
었다.
[내일로 계속……]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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