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법인 동서학원 설립자 장성만 박사의 1인 3역
역 경 의 열 매 |
기도는 추상화를 정물화로 만든다
일찍 신앙을 가진 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이 원격조종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1953년 1월 1일
인생 여정의 한 획을 긋는 날이다. 우리 집 2층에 대교그
리스도의교회를 개척했다. 교인은 총 7명, 비록 초라한 예배
당이지만, 말씀을 전하고 성찬식을 베풀었다. 실로 감격
적인 예배였다.
대교그리스도의교회는 곧 국제적인 교회로 급부상했다.
국내외에 머물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거 우리 교회를 찿
은 것이다.
당시 부산에 머물던 빌스(Bills), 세걸키(Segglki), 엘리스
(Ellis) 선교사 가족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맥시(Maxey), 데
이비드(Dav클라크(Clark), 심스(Sims) 선교사도 교회
를 찾아왔다. 우리 교회는 갑자기 국제적인 교회로 부상했
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집결지가 된 것이다.
그중에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 주신 귀한 분이 있었다.
그분은 내 인생의 설계도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마크 맥시(Mark G. Maxey).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이름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이 타인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봉사할 수 있는
지를 삶으로 보여준 선교사다.
원래 그는 미국 종군목사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분이다.
종전 후 전역하여 일본 선교사로 파송받아 규슈 남단 가
노야에서 교회를 개척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6·25전쟁으로 처참한 상황에 처한 한국의 소식이
궁금해 방한했다. 그때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이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 주신 수
호천사였다.
"장성만 목사, 좀 더 웅대한 꿈을 가져요. 세계는 아주 넓
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일본에
유학 와서 공부할 생각은 없나요? 내가 당신의 모든 삶을
보장하겠습니다."
그는 스무 번도 넘게 한국을 찾았다. 그때마다 내 가슴속
에 `신학의 바다`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심어 주었다.
`외국 유학` 그것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땅에 사는 젊은
이가 꿈꿀 수 있는 그런 그림이 아니었다. 서울에 올라가기
도 힘든 상황에 무슨 외국 유학이란 말인가, 당장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가슴속에는 끊임없이 `희망의 호흡`이 쿵덕거렸
다. `유학` 그 엄청난 꿈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꿈을 버
리면 안 된다."
성경을 펼쳐 들 때마다 격려의 메시지가 클로즈업되어 나
타났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
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
도하시리라" (잠언 3장 5~6절)
유학의 꿈을 갖고 계속 기도를 그렸다. 그런데 기도하면
할수록 꿈의 그림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힘이었다. 기도는 `추상화`를 `정물화`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마음은 벌써 일본의 어느 신학교 교실에 앉아 있었다. 외
국인 교수들의 강의에 심취된 모습이 상상되었다. 학문의
바다에서 새로운 지식을 포향(飽享)하는 장면들이 자꾸 떠올
랐다.
`가자, 일본으로 가자,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일본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맥시 선교사에게 그 뜻
을 전했다.
"일본에서 공부하게 해 주세요."
그는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참 잘 생각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일본 오사카의 성서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직도 내 앞 길을 첩첩산중이었다.
당시 한.일 외교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비자를 받기
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맥시 선교사는 수십 번 일본 법무성
을 찾아가 비자 발급을 요청했다. 규슈에서 도교를 오가며
보낸 시간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왜 유학을 가려 하는가, 나의 유학을 위해서인가, 가족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조국을 위해서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후자였다.
`신학문을 배워 조국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리라, 이 민
족의 가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어 주리라.`
규슈행 배에 몸을 실었다. 당시엔 일본행 비행기가 없었다.
부산을 출발한 배는 20시간이 넘게 바다에 떠 있었다. 칠
흑같은 어둠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
지를 일찍 여읜 소년가장에게 일본 유학이 웬말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다.
`내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예수 없는 인생, 예수 없는 젊음은
얼마나 허허로운가.
일찍 신앙을 가진 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나의 인생은 하
나님이 원격조종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도 두
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시야 41장 10절을 속으로 묵상하면서 힘을 얻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
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
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
리라"(이사야 41장 10절)
그것은 두려움 없는 도전이었다. 일본 유학은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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