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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구의 비거(飛車) ③

eorks 2019. 11. 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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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구의 비거(飛車) ③
    3. 정평구 소년의 이야기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 정평구 소년은 그 명석한 두뇌로 공부에 힘써서 과거에 라도 응시해서 입신 양명의 길을 더듬었을 것인데 그 해 겨울부터 아버지 정춘수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이 듬해 봄에는 병세가 더욱 심해져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 하고 있었다. 열세 살의 겨울, 정평구 소년은 고달팠다. 아버지 병구완 하느라고 침식을 잊고 약시중 들랴 낮이나 밤이나 다리 팔 을 주무르랴 밤 잠 한잠 못 자고 꼬박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런 어느날 아버지는 정평구 소년을 앞에다 불러 놓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이었다. "평구야. 아비는 아무래도 더 못할 것같으니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다오." 그 한마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정평구의 아버지 정춘수 는 세상을 떠났다. 3년 시묘살이. 무덤 앞에 움을 파고서 3년 동안 시묘를 사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평구의 곡소리가 끊어진 적이 없었다. 어느덧 청년 티가 나기 시작한 정평구. 명색이 양반이라 는 반가 출신이었다. 비록 향리는 전라도 김제 땅이었지만 어찌어찌 선대 시절 가세가 기울자 횡성 땅이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정착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3년 상을 마친 정평구는 서울로 과거길을 떠났다. 사랑하는 처자식을 남겨두고 떠나는 과거길은 그래서 더 욱 마음이 무거웠다. 원주 감영을 지나 여주를 거쳐서 여러 날 만에 서울 장안 에 들어섰다. 성균관 근처 반촌이 과거보러 온 지방 선비들 이 몰려든다 하여 행여 좋은 정보라도 얻을까 싶어 정평구 도 반촌 한 여각에 괴나리봇짐을 풀었다. 그래도 횡성 산골에서는 신동이니 천재니 하는 말을 들었 고 글도 제법 한데다 글솜씨 또한 빠짐이 없으리라 생각했 었는데 몇 해가 지나고 보니 머리 속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번의 과거는 문과와 무과를 다 보인다는 소문이 라 혼자서 "되나 안되나 문과 무과 다 쳐보자."하고 마음을 다졌다. 과거 날이 왔다. 과장에 들어가 보니 8도 선비가 구름같이 모였다. 선비들이 글 쓰는 것을 곁눈으로 둘러보니 그럴 듯 한 글이 눈에 띄지 않아 "에라, 한 장 써 넣어 보자."하고 일 필휘지로 써내었는데 보기좋게 낙방이었다. 횡성 시골 신동 도 별 볼이 없었다. 다시 무과를 보았다. 무과에는 겨우 급제되었다. 변변한 벼슬자리 한 자리 얻을 도리도 없어 하릴없이 고향인 횡성 으로 내려 갈 판이었다. 이때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를 제수받은 이억기(李億祺)가 정평구에게 따듯한 손길을 뻗쳐 왔던 것이다. 이때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는 정평구에 대해 안쓰 러운 마을을 품고 있었다.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다. 나라의 형편이 이렇지만 않았 다면 중용될 수도 있었던 인재인 것을..." 생각 끝에 이억기 절제사는 진주 병사 김시민에게 청해서 정평구를 경상도 진주 병영 별군관으로 가 있게 했다. 진주 병영으로 내려간 정평구에게는 따분한 날의 연속이 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다음에 계속~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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