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談.野史.說話

정평구의 비거(飛車) ④

eorks 2019. 11. 2. 00:05
野談 ♡ 野史 ♡ 說話

정평구의 비거(飛車) ④
    4. 서기 1592년(선조 25) 4월, 청천 벽력같은 왜란이 벌어 졌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연달아 들어오는 패전 비보-. 왜적들은 부산, 동래를 순 식간에 쳐 부수고 폭풍같이 무인지경을 달렸다. 4월 27일에는 왜적들이 충주에 철통같이 벌여 놓은 신립 장군의 학우진을 여지없이 깨뜨리더니 신립으로 하여금 탄금대 아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4월 그믐날인 30일에 임금 선조는 구중 궁궐을 뒤에 두고 허둥지둥 서북 방향으로 피란을 떠났다. 왜적은 승승장구, 서울까지 치밀었다. 중앙에 소서 행장, 동편에 가등 청정, 서편에 흑전 장정 세 무리가 하도 신나게 가는 곳마다 쳐부수니 "누가 먼저 한양에 쳐들어가느냐"하고 경쟁하며 큰길에서 좀 떨어진 고을은 돌아볼 여지도 없이 쳐올라 가느라고 진주 병영 같 은 데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주력이 쳐올라간 뒤를 또 다른 왜적의 무리들이 빈터만 남은 부산, 동래를 거쳐 차차 북으로 행군하다가 선진 세 무리가 이르는 곳마다 짓밟고 무인지경같이 쳐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주 마음을 놓고 늑장을 부렸다. "우리는 구경이나 하면서 놀며 가세. 어디 기생 있고 경 치도 좋은 고을이 없나? 하지만 선진 무리들이 너무 참혹 하게 쳐부수어서 빈터만 남아 있네…가등이 같은 왈패들 이 지나간 데니 오죽할려구...우리도 심심한데 어디 한 군 데 들어가 보세나." "좋은 말이야. 이 근처에 기생 많고 경치 좋은 진주란 곳 이 있네. 거기나 들어가 보세." 후진 패거리들이 삼랑진에서 서쪽으로 돌면서 행군을 하 기 시작했다. 까마귀떼처럼 왜병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은 진주성 안팎 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동안 왜병들은 남강을 건너 진주 성 가까이 도달했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채 피난을 갈 사이 도 없이 성안으로 몰려들어 와글와글 들끓었다. 진주는 경상우도 병마의 주력이 있는 곳이다.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첩보를 받고는 성 둘레의 인공 호수를 정비하고 염초 5백 10근, 총통 70여명 을 준비한 다음 지대가 높은 서장대(西將臺)에 깃발을 높 이 꽂고 성 안의 여자와 노약자들에게까지 남복을 입혀 장 정으로 위장시킨 후 정병 3천 8백을 사열, 전열을 가다듬 었다. 이때 정평구는 진주성 문루에서 왜군을 보며 생각을 거 듭했다. 정평구의 머리에 "유능제강(柔能制强)"이란 사자 성어가 떠올랐다. 정평구는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짚을 모아들여다가 짚단 을 만들어 성 위에 주욱 세워놓고 그 위에서 활을 쏘게 했다. 우선은 생각이 적중한 것같았다. 왜적이 쏜 총알이 직접 사람에게 맞지 않고 짚단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도 결정적 인 계책은 될 수가 없었다. 총알이 짚에 박히는 순간, 불이 붙어서 사람이 타 죽을 지경이었다. 정평구는 병사들에게 성문을 단단히 지키게 하고는 방에 쳐박혀서 무엇인지 골돌히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틀 이 지났다. "됐다!" 정평구는 무릎을 탁 쳤다. 이틀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몰두하며 연구한 결과가 마침내 완성된 것이었다. 타 고난 발명가의 자질을 갖춘 정평구 별군관이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날으는 수레, 비거(飛車)였다. 일종의 수송용 비 행기였다. 정평구는 뒷산에서 참나무를 베어다가 모양도 이상야릇한 수레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들과 병사들의 머리털을 잘라 굵직한 밧줄을 만들어 그 수레에 이리 얽고 저리 얽었다. 그리고 나서 정평구가 그 수레에 올라타더니 운전을 시작 했다. "피융∼쑤∼" 하는 소리가 나더니 수레가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가는 것이었다. "야아∼, 정군관님이 탄 수레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간다!" 수레는 먼 거리까지 날아갔다. 일종의 비행기였다. "왜놈들 진지 넘어까지 휘익 날아가다니 참 이상하다!" 왜적의 포위로 성안의 양식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어떻게든지 양식을 구해 들여야만 했다. 성밖에는 왜적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어서 식량을 구해 올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궁리해 낸 것이 이 비거였다. 한번 발을 구르면 여러 개의 바퀴가 돌아가는데 바퀴가 연동을 해서 공중으 로 치솟아 왜적들이 에워싼 지대를 뛰어넘어 식량을 싣고 다시 성안으로 돌아올 수가 있는 신형 병기였다. 진주성의 관군도 백성들도 정평구 별군관의 비거에 혀를 내 두르며 놀라워했다. 그런데 정평구는 식량 운반에만 그치지 않고 수레가 공 중으로 5리를 올라가 50리를 단숨에 날아갈 수 있게 만들 어 양식 운반에 그치지 않고 왜적을 물리치는데도 사용하 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정평구는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미 어떻게 하면 왜적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끝에 왜적이 쏘는 조총과 맞먹는 위력을 가진 무기 개발에 골몰했던 것이다. 어렸을 적, 범을 잡을 때, 웅덩이를 파서 생포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정평구는 이제 발명가가 되었던 것이다. 정평구는 창고에 있는 화약과 염초를 가지고 여러 가지 로 연구 끝에 지포(紙砲) 즉 종이 딱총을 만들어 보았다. 정평구는 자신이 개발한 비거에 지포를 많이 싣고 거기 다가 큼직한 돌을 몇 개 실어가지고 공중으로 올라가 성밖 으로 날아가며 왜진에 지포를 터뜨리고 돌덩어리를 던져 보았다. 지포 터지는 소리는 산이 무너지는 듯 했고 동덩 어리가 우박처럼 쏟아지자 왜적들은 청천벽력을 만난 듯 혼비백산, 진주성의 포위망을 풀고 남강 건너로 물러섰다. 정평구의 비거로 진주성 관민의 사기는 충천했다. 멀리 물러나는 적병들을 향해 활을 쏘는 등 백성들의 전의는 활 활 불타 올랐다. 그러나 처음 얼마 동안은 정신 없이 방황하던 왜적들도 비거가 달랑 한 대 뿐인데다가 돌도 몇 개 싣지 못하고 지 포도 소리만 요란했지 사람을 상하지 않자 왜적들은 어린 이의 장난감쯤으로 치부하고 다시 진주성을 포위하기 시 작했다. 그래도 정평구는 비거를 타고 왜진을 향해 지포를 쏘고 돌을 내던졌다. 왜병들은 공중에 떠도는 비거를 향해 조총 을 마구 쏘아 댔다. 그러나 아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조 총의 위력도 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의 조총은 총열에 화 약을 재어 넣고 총알을 넣어서 화승불로 불을 당겨 터뜨리 는 총이라 정평구가 조종하는 비거에까지는 총알이 이르지 못했다. 그렇게 싸우기 열 나흘. 열닷새 되는 날은 지포를 다 쓰고 없어서 돌만 싣고 올라가 싸웠다. 그러나 국운이 비색한 탓 인가, 그토록 용맹하게 싸웠던 정평구, 왜적의 총알이 머리 와 가슴을 관통하고 말았다. 주인을 잃은 비거는 정평구의 시체를 실은 채 거꾸로 떨 어지더니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이때의 정평구 별군관의 나이 39세. 한편 조선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 비격진천뢰(飛擊震 天雷), 질리포로 왜적을 공격했고 민간인들은 성루에 준비 해 둔 돌을 굴리고 쇠솥의 끓는 물을 적병의 머리에 퍼부 었다. 데어 죽는 자, 머리가 으깨어진 자, 가슴에 화살이 꽂힌 자 등 왜적의 시체도 성 둘레에 질펀했다. 연일 계속되는 왜적의 공격을 방어하던 병사 김시민 장 군이 적이 쏜 유탄에 왼쪽 이마를 맞고 쓰러졌다. 마침내 3만의 왜적은 지리멸렬 패전 끝에 포위를 풀고 도 주했다. 그러나 적탄을 맞고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던 병사 김시민 은 전복으로 갈아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진 중에서 전몰했다. 김시민의 나이도 정평구 별군관과 같은 39세. 그 얼마후 진주 기생 논개가 왜장의 허리를 끼어 안고 남 강 물에 빠져 죽으니 지금도 남강가에는 논개가 왜장과 함 께 목숨을 버렸던 의암(義巖)이 남아 옛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백두대간^^........白頭大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