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독일 /베를린 장벽의 축조와 붕괴 그리고 1990년 「2+4 조약」
[Construction and Fall of the Berlin Wall and the Two-Plus-Four-Treaty of 1990]
Treaty on final settlement with respect to Germany, 12/09/1990
Treaty on final settlement with respect to Germany, 12/09/1990
Treaty on final settlement with respect to Germany, 12/09/1990
Peter Fechter, shot at while trying to escape
국가 : 독일(Germany)
소장 및 관리기관 : 독일방송기록보관소(Deutsches Rundfunkarchiv),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방송(Rundfunk Berlin-Brandenburg), 베를린 국가기록보관소(Landesarchiv Berlin), 자유와 한자동맹의 도시 함부르크 국가기록보관소(Staatsarchiv der Freien und Hansestadt Hamburg), 슈피겔 TV(Spiegel TV), 베를린 경찰역사전시관(Polizeipräsidenten), 연방기록보관소(Bundesarchiv), 상수시 영화사(Sanssouci Film GmbH), 외교부정치기록보관소(Politisches Archiv)1)
등재연도 : 2011년
이 문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가 남긴 독일, 유럽 그리고 세계 전체의 정치적 유산과 공동의 기억에 관한 근본적이며 고유한 부분을 담고 있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적인 기념물이었다. ‘발트 해의 슈테틴(Stettin)에서부터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Trieste)까지 유럽 대륙을 가르며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1946년에 이미 이렇게 진단한 유럽의 분단은 20세기 후반기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전개 양상 가운데 하나였다. 나치 독일을 상대로 하는 반(反)히틀러 연합세력이 승리했지만 바라마지 않았던 자유롭고 민주적인 유럽을 향한 열망은 이후로도 충족되지 않았다. 소련은 군대가 점령한 영토 위에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수립하였다. 동·서 대립과 화해할 수 없는 두 체제가 각자의 세력과 영향력을 추구하며 전 세계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이러한 냉전의 주요 대결 장소 중의 하나는 분단된 독일, 바로 분단된 베를린이었다.
1961년 8월 13일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독일과 유럽, 나아가 이 세계의 정치적 분단을 공고히 만드는 상징이었다. 애초의 가시철조망 울타리는 체계적으로 콘크리트 장벽으로 변모하였고, 그 장벽은 다시 폭 15m에서 150m 이상에 이르는 ‘죽음의 띠(death strip)’로 둘러싸였다. 감시탑·전기신호 울타리·쇠사슬에 묶인 경비견, 차량의 진입을 가로막는 도랑, 사살하라는 명령(독일어로 ‘Schiessbefehl’)을 받은 무장 경비병들이 삼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베를린 장벽은 독일민주주의공화국(GDR)의 정치선전과는 달리 외부의 적에게 대항하기 위한 방어개념의 장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내를 향한, 자국민의 탈출을 방해하기 위한, 다시 말해 체제의 반대를 막기 위한 장벽이었다. 베를린 장벽은 소비에트 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많은 나라의 정치적 억압을 보여 주는 전 세계적인 상징이자 그 국민에게 기본적인 인권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취약한 공산주의 정권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1989년 11월 9일 밤에 일어난,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그해에 유럽 곳곳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해 일어난 여러 혁명에서 볼 수 있었던 중요한 순간의 하나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독일 및 유럽 대륙의 정치적 분단의 종식뿐만 아니라 냉전과 서유럽 및 동유럽 진영 체제의 와해를 의미했다.
양 진영이 대치하면서 대결과 긴장 완화(데탕트, détente)의 국면이 교차되었던 반세기 동안 이 세계는 핵전쟁의 위협에 거듭 직면했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볼 때, 1990년에 진행된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과 동독과 서독의 대표로 구성된 「2+4 조약」에 관한 협상은 수십 년에 걸쳐서 새겨온 적대국의 상(像)을 극복하는 외교력과 국정운영 능력의 걸작이었다. 그 덕분에 독일은 통일을 이루고, 유럽 통합의 과정은 진일보하였다.
이 기록물은 냉전에 관한 역사적 증거와 서사의 일부에 해당한다. 그런 만큼 관련된 역사 연구와 분석 및 반성을 위한 맥락을 제공하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
이 문서는 세계적인 중요성과 고유성, 대체 불가능성을 보유한다. 베를린 장벽의 축조 및 붕괴, 그리고 그 각각이 낳은 결과에 관한 세계의 지식은 각종 매체, 특히 영화와 사진을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의 시작과 종말을 각각 상징하는 1961년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의 기자회견 장면과 1989년 귄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의 기자회견 장면, 장벽의 구축, 이어진 구역별 국경 벽의 구축, 마침내 장벽의 붕괴 장면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적으로 방송되고 또 재방송되고 있다.
이 세계기록유산의 시청각 자료는 고유하면서 대체 불가능한 원본으로서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참고하고 재사용할 수 있다.
탈출에 성공한 국경 경찰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 ‘자유를 향한 점프’)의 1961년 사진, 탈출 시도 중 총에 맞아 쓰러진 뒤 장벽 옆에서 피를 흘리면 속절없이 죽어갔던 소년 페터 페흐터(Peter Fechter, 1962년)의 사진은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베를린 장벽이 초래한 충격을 상징했고, 오늘날까지 전 세계인의 마음속에 베를린 장벽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사진들은 세계 사진계의 우상이 되었다.
1988년 옛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 인근의 슈프레 강(Spree River)을 건너 탈출에 성공하는 장관을 담은 사진 역시 마찬가지이다.
1963년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87년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행한 두 차례에 걸친 베를린 연설은 베를린 장벽의 역사, 그리고 두 미국 대통령 각각의 개인사와 이후의 세계 정치의 흐름에 관한 기억을 세계에 새겨 놓았다.
끝으로, 1990년의 「2+4 조약」은 특별한 방식으로 세계적 중요성, 고유성, 대체 불가능성을 부여받았다. 1990년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과 동독과 서독의 국가원수 사이에 진행된 협상과 그 산물인 「2+4 조약」은 외교력과 국정운영 능력의 걸작이었다. 수십 년에 걸쳐서 새겨온 적대국의 상과, 이 세계를 반복해서 핵전쟁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대결과 긴장 완화(데탕트, détente)의 국면이 요동치며 교차했던 긴 세월을 극복하였다. 「2+4 조약」 덕분에 독일은 통일을 이루고(1990), 유럽 통합의 과정은 진일보하였으며, 세계를 동쪽 진영과 서쪽 진영으로 양분한 정치적 분단이 종식하였다.
냉전에 관한 역사적 증거와 서사의 일부에 해당하는 이 기록물은 관련된 역사 연구와 분석 및 반성을 위한 맥락을 제공하는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 장벽의 축조와 붕괴 그리고 1990년 「2+4 조약」 [Construction and Fall of the Berlin Wall and the Two-Plus-Four-Treaty of 1990]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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