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편집(309)

eorks 2020. 4. 9. 02:54

세계기록유산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편집
[ Utrecht Psalter]

위트레흐트 시편집

위트레흐트 시편집

위트레흐트 시편집

위트레흐트 시편집

위트레흐트 시편집


국가 : 네덜란드(Netherlands)
소장 및 관리기관 : 위트레흐트 대학교 도서관(University Library of Utrecht)
등재연도 : 2015년
채식 사본(彩飾寫本) 가운데 『위트레흐트 시편집(Utrecht Psalter)』만큼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던 책은 별로 없을 것이다. 후기 로마 시대의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특징적인 『위트레흐트 시편집』에는 시편(詩篇, Psalm) 150편과 찬가(讚歌, canticle) 16편에 딸린 166점의 도해(圖解)가 가히 혁신적이고 역동적 스타일로 표현되어 있으며, 올바른 통치자가 지녀야 할 자세를 시각적 메시지로 표현한 필사본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상의 측면들은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제작 시기가 카롤링거 문화의 절정기라는 특징적인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이 시편집이 만들어진 시기는 후기 로마 예술이 카롤링거 양식의 예술로 ‘전환’되는 중요한 연결고리 해당한다. 초창기에 만들어진 현전하는 다른 사본들과 비교할 때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풍성한 모티프는 압권이라 할만하다. 책 속의 도해는 당대에 치러진 전쟁과 폭력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분명히 (미래의) 왕에게 가르칠 도덕적 교훈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최초의 시각적인 ‘군주의 거울(本, 본보기)’이었던 셈이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이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약 830년경 당시 서방 문명의 중심지였던 프랑크왕국(Francia) 북부, 랭스(Reims) 인근에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의 스타일과 도해는 9세기에는 북부 프랑크왕국에 영향을 미쳤고 1000년부터 1200년 사이에는 캔터베리(Canterbury)에서 제작된 수많은 채식 사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채식 사본 가운데 『위트레흐트 시편집』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그토록 깊은 예술적 영향을 끼친 책은 없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기독교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필사본으로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세계적 중요성 · 고유성 · 대체 불가능성 :
“구체적인 비전과 열정적인 도안공(圖案工)의 기량, 그리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음에 틀림없는 전통이 역설적으로 융합된 결과물인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전 세계 학자들의 칭송과 관심을 불러일으켜 왔다.”

“드로잉 속에서 드러나는 열정과 예술적 재능 덕분에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중세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카롤링거 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필사본 가운데에서, 아니 전 시대를 통틀어 모든 채식 사본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하고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전문가들은 매우 특별한 필사본인 『위트레흐트 시편집』에 대해 제작된 동시대의 필사본은 물론이고 중세에 제작된 전체 필사본을 감안하더라도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고 여기고 있음에 이견이 없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독보적인 지위는 19세기 중반부터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되풀이하여 재확인되어 왔다.

그럼에도 『위트레흐트 시편집』에 관한 수많은 사항들은 오늘날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학자들은 『위트레흐트 시편집』이 랭스 혹은 오빌레르(Hautvillers, 『에보 시편집(Ebbo Psalter)』이 제작된 곳) 인근에서 제작되었음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제작 연도에 관해서는 823년(Alibert 2009)부터 845년 사이, 심지어 그 이후까지(Chazelle 1997)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주문자로는 랭스 대주교 에보(Ebbo, 816~835, 840~841)가 종종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누가 주문한 것인지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수령인에 대해서도 경건왕 루이(Louis the Pious, 샤를마뉴 대제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 814~840) 또는 그의 아들인 대머리왕 샤를(Charles the Bald, 823~877)이 종종 언급된다. 하지만 주문자와 수령인이 카롤링거 왕조의 최고위층 엘리트들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이 그토록 특별하고 고유하며, 기독교 예술사 및 카롤링거 문화에서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엄청난 영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과 관련하여 『위트레흐트 시편집』을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록유산으로 꼽는 근거는 다음과 같은 5가지가 있다.

1) 『위트레흐트 시편집』 전체 작품에 나타나는 수준 높은 드로잉들과 결합된 광범한 도상학적 프로그램(iconographic programme)은 현전하는 카롤링거 시대의 사본들 가운데 유일하다.

2) 혁신적이고 새로운 스타일의 드로잉이 표현된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당시 영향력 있었던 랭스 화파의 채식 사본에 나타난 특징인 역동적인 드로잉과 스케치를 보여주는 전형이다.

3)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후기 로마 시대로부터 전승받은 시편 도해의 가장 완벽한 사이클(cycle, 라틴어 알파벳을 이용하여 배열된 시편들의 순서)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 사이클은 비잔틴 교회나 서방 가톨릭교회의 사본에서도 발견된다. 화가들은 기본적인 제재(題材)를 이용하여 도해를 그리긴 했지만 옛것(고대 회화)과 새것(중세 회화)을 솜씨 좋게 결합함으로써 그림에 이전과 다른 카롤링거 왕조의 양식을 구현했다.

4)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우리에게 카롤링거 왕조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시대의 창(窓)을 제공한다. 화가들은 당대의 선과 악의 언저리에서 찾을 수 있는 테마, 특히 폭력과 전쟁, 왕권의 행사 등을 집중 선택하고 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지배 엘리트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최초의 시각적인 ‘군주의 거울’이라고 간주된다.

5) 약 830년부터 1,200년까지,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스타일과 도해는 처음에는 북부 프랑크왕국에 영향을 미쳤고 나중에는 영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채식 사본 가운데 『위트레흐트 시편집』만큼 오랜 시간 그토록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책은 없다.

이상의 5가지 근거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4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제작된 후기 로마 시대의 필사본과 시각적으로 거의 완전히 일치해 보인다. 비교적 크고 넓은 크기에 본문을 3개 칼럼으로 나누고 글은 우아하고 섬세한 러스틱 대문자(Rustic capitals, 루스티카 서체)로 썼다. 이 서체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서체지만 카롤링거 왕조에서도 특히 각 장의 제목에 쓰였다. 시편의 첫 행은 커다란 언셜체(uncial)로 쓰고, 각 시편의 제목과 첫 구절은 붉은 색 언셜체로 썼다.(시편 17편의 첫 행은 금박으로 장식했다) 이 언셜체 역시 후기 로마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드로잉은 후기 로마 시대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특히 건물 · 풍경 · 동물, 인물들의 복장, 태양과 달, 그리고 상징적 도상인 지구를 들고 있는 아틀라스 등은 후기 로마 예술의 묘사와 거의 유사하다. 그런데 첫 시편의 시작 부분인‘베아투스 비르(Beatus vir, 시편 112편)’의 ‘B’의 장식만은 후기 로마 양식과 같지 않으며 히베르노-색슨 양식(Hiberno-Saxon style, 7세기 서유럽 서체 양식) 사본에 나타나는 서체 장식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면밀히 살펴보았을 때에만 물 오르간(water organ, 수력 풀무장치로 작동되는 오르간)과 같은 카롤링거 시대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 필사본에는 후기 로마 예술의 장엄함을 간절히 닮고 싶어 했던 카롤링거 시대 엘리트의 의식적 노력이 잘 나타나 있다. 특별히 독특한 채식 사본인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카롤링거 시대에 이루어진 후기 로마 시대와 고대 예술의 재발견을 상징한다.

150편의 시편과 16편의 찬가를 장식하는 작업에는 최소한 8명의 도안공이 참여했다. 16편의 찬가는 카롤링거 시대의 시편집에 일반적으로 들어 있는 전례곡 · 전례기도 · 전례문을 말하는데 이 시기의 다른 채식 시편집에서 찬가를 장식한 경우는 『위트레흐트 시편집』 이외에는 없다.

이 모든 특징을 종합해 볼 때 166점의 도해는 기록에 대한 범위 · 포부 · 질적 수준이라는 관점에서 카롤링거 시대와 그 이후에 제작된 모든 필사본을 가볍게 뛰어넘는 탁월한 작품이다. 물론 화려한 채색과 빛나는 금박 장식을 입혀 더욱 풍성하게 장식한 필사본들이 분명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도 카롤링거 시대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각적 창(窓)의 역할을 하는 광범한 도상학적 프로그램을 적용한 작품은 없다.

시편 본문의 내용을 이미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지식과 함께 창의력이 필요하다. 카롤링거 시대 학자들의 지적인 능력이 시각 예술과 결합되어 이토록 놀라운 결과물을 낳은 사례는 현전하는 다른 예술 작품에서 찾기 힘들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연구 및 재생산되는 중세 채식 사본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위트레흐트 시편집』에 대한 수많은 학술 논문과 구글 학술(Google Scholar) 검색창에 ‘Utrecht Psalter’라고 검색했을 때 나타나는 1,260건(2014년 3월 20일 현재 기록)의 검색 결과만 보아도 알 수 있으며, 이는 중세의 채식 사본 가운데 『켈스의 서(Book of Kells)』나 『린디스판 복음서(Lindisfarne Gospels)』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복제본에 대한 요청은 거의 1주일에 한 번 꼴로 이루어지고 있다.

2) 도해 작업에 참여했던 8명의 화가는 저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어서 몇몇 드로잉은 적절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경우도 꽤 있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스타일은 독창적이며 매우 생동감 넘친다. 이것은 카롤링거 시대의 수많은 지방 ‘스크립토리아(scriptoria, 필사실)’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이 있었던 랭스 화파(약 820~900년)의 사본 장식(寫本裝飾, 일루미네이션)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랭스 화파는 단순히 후기 로마 시대의 역동성과 인물의 자연스러운 묘사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서방교회의 기독교 예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롤링거 시대 이전의 기독교 사본 장식에는 기하학적 패턴의 형태, 예수 · 다윗 · 복음사가들 같은 한정된 인물의 묘사, 굵은 선으로 그려진 정적인 포즈 등의 장식이 일반적으로 발견된다. 이러한 과거의 스타일과 비교할 때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때로 초현실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행동과 감정이 충만한 역동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새로운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게다가 묘사하고 있는 대상이나 삽입된 드로잉 전체의 수만으로도 전작들과는 확실히 구분된다. 각 시편의 구절을 장식한 풍성한 도상학적 프로그램과 함께 각각의 페이지 전체에 걸쳐 표현된 총 166점의 장식은 수 세기 동안 창조된 적이 없는 스타일이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9세기 초의 독자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할 작품이다.’

3) 서기 900년경 이전에 완성된 장식 시편집들 가운데 현전하는 작품은 거의 없다. 『코르비 시편집(Corbie Psalter)』(약 800년) · 『슈투트가르트 시편집(Stuttgart Psalter)』(파리,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Prés), 약 820~830년) · 『클루도프 시편집(Khludov Psalter)』(콘스탄티노플, 약 850년) · 『그리스어 파리 시편집(Greek Paris Psalter)』(콘스탄티노플, 약 850년) 등의 필사본과 비교해 보면 몇몇 채식 시편집이 『위트레흐트 시편집』과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으로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화가들이 후기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하나 아니면 여러 권의 장식 시편집의 시편 사이클(psalm cycles)을 참조했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참고했을 것 같은 사본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현전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코르비 시편집(Corbie Psalter)』의 경우에는 첫머리에 쓰는 대문자를 그림으로 장식했고, 『클루도프 시편집』과 『그리스어 파리 시 편집』의 경우에는 페이지의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어서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에 심한 제약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슈투트가르트 시편집』의 경우 150편의 시편 전체가 장식되어 있는데, 다만 조금 더 조악하고 전통적인 화풍을 따랐으며, 판본의 크기가 작고 둘레가 고정되어 있어 글자 장식에 있어 유형학적으로 한두 가지의 모티프만을 겨우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달리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예술가들은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고 덕분에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연대순으로 배열된 모티브의 파노라마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런 특징은 『바티칸 베르길리우스(Vergilius Vaticanus)』 · 『빈 창세기(Vienna Genesis)』 · 『코튼의 창세기(Cotton Genesis)』 · 『코덱스 푸르푸레우스 로사넨시스(Codex Purpureus Rossanensis)』등과 같은 현전하는 몇몇 후기 로마 시대의 채식 사본에서 나타난 레이아웃을 반영한 것이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도해 및 스타일과 관련하여 초기에 시편 사이클을 어떻게 보여 주어야 할지 고민하여 창조한 최상의 표현 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카롤링거 시대의 예술가들이 독창성 없이 모방만 했던 것은 아니고 다만 자신들이 보았던 후기 로마 시대의 이미지를 ‘해석’하고,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고, 대부분의 찬가에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면서 『위트레흐트 시편집』 전체를 시각적인 도덕 교훈으로서 재설계한 것이다.

4) 『위트레흐트 시편집』에 있는 대부분의 드로잉들은 시편의 내용을 쫓아 ‘글자 그대로’ 묘사했다. 시편의 어떤 구절이 그리스도의 생애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미리 암시한다고 생각한 예술가들은 시편들의 유형학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을 돕고자 명확한 경우에 한해서 몇몇 특정한 장면을 추가하였다.

예를 들어, 시편 115편 3절(지금의 시편 116장 13절) ‘내가 구원의 잔을 들리라’는 십자가에 묶인 예수 곁에서 예수의 피를 받기 위해서 시편 기자가 ‘구원의 잔(chalice of salvation)’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고대 기독교의 전통 모티브에서는 이 장면을 아몬드 모양의 후광(mandoria)을 받고 서 있는 예수, 또는 둥근 왕좌에 앉은 예수를 천사들이 받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몇몇 도해는 시편의 내용과 간접적인 관련만 있을 뿐이다. 시편 50편의 제목 ‘다윗의 시,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는 다윗이 지었다고 여겨져 왔던 시편의 한 순간을 언급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열왕기하 12장(오늘날에는 사무엘하 12장)에 묘사되어 있다. 다윗은 밧세바의 육체를 탐했고, 그녀를 임신시킨 사실을 감추고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 싸우게 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선지자 나단은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려고 가난한 자의 귀한 어린 양을 빼앗은 부자에 대한 우화를 통해 다윗을 꾸짖었다. 다윗은 자신이 우리아에게 저지른 짓이 부자가 한 짓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후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이 카롤링거 시대의 정치이론(政治理論)에서는 매우 중요한 테마였다. 이 모든 이야기를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9세기까지 제작된 여러 채식 시편집들보다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장식 묘사하고 있다. 한편 시편의 텍스트 자체를 묘사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그런 예외적인 경우는 대개 왕권의 행사와 관련된 것이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회화적 언어(pictorial language) 전체는 선과 악 사이의 투쟁에 집중하고 있다. 많은 도해들은 폭력과 전쟁, 무고한 자들의 고난과 죄인을 기다리고 있는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죄를 지은 자들은 대개 무장한 천사들에 의해 지옥으로 떨어지는데, 그 묘사 방식이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작품 중 하나를 연상케 한다.

시편 기자는 흔히 수동적인 관찰자로 묘사된다. 여러 장식된 시편들은 악의 군대에 대항한 실제 전쟁이나 영적인 전투에서 사울이나 다윗 왕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사악한 왕은 대개 무장한 병사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회화적 언어를 선택한 것을 보면 (후대의) 왕 자신은 아닐지라도 정치적 · 종교적 엘리트가 이 시편의 독자층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선과 악의 투쟁이 흔한 주제였다는 사실은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첫 번째와 마지막 도해에서 특히 잘 표현되어 있다. 첫 번째 도해에는 유일하게 전체 페이지가 할애되었다. 여기에서 ‘복 있는 자(베아투스 비르)’는 하나님의 법을 기록한 책을 읽으며 7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즉, 지혜의 일곱 기둥) 돔 형태의 포르티코 지붕 아래에서 명상을 하고 있고 그 위에는 태양이 빛난다. 그의 뒤에는 천사가 있고, 그의 아래에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는 열매가 풍성한 나무가 있다.

맞은편에 왕처럼 보이는 인물은 손에 칼을 들고 병사들에 둘러싸여 있다. 왕은 박공지붕의 포르티코에 앉아 있는데 시간은 밤이며, 그의 왼쪽에는 사탄처럼 보이는 형상이 있고, 그의 아래에는 저주 받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베아투스 비르와 병사들에 둘러싸인 왕 사이에는 시편 기자와 그의 동행인이 서 있는데, 마치 선과 악 사이의 선택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 첫 번째 시편은 글은 없지만 전하는 시각적 메시지는 명확하다.

추가된 시편(151편)은 마지막 페이지에 있다. 병사들에 둘러싸인 사울이 무릎 위에 칼을 놓고 박공지붕의 포르티코에 앉아 있다. 오른쪽에는 젊은 다윗에 관한 세 장면인 물 오르간, 양 돌보기,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이 묘사되어 있다. 위풍당당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스라엘을 구할 현명한 왕이 될 운명은 사울이 아닌 다윗이 타고났으며, 시편을 쓰는 임무를 명받은 사람 또한 다윗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 교훈은 명백하며 첫 번째 시편에서 암시한 ‘거울(본(本))’을 보여준 그림이다. 즉, 통치자라면 자신의 힘만을 믿는 호전적인 사울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한 종, 다윗을 본받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이상의 것들과 또 다른 사례를 통해 기독교 제국이 갖추어야 할 올바른 통치 교훈인 시편의 도덕적 · 종교적 가르침을 시각적 ‘군주의 거울’로써 새롭게 변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제왕 수업’은 이전 시기에 혹은 동시대의 여러 채식 시편에서는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으며, 830년 이전에 제작된 채식 사본 가운데에 이런 사례는 아예 없다. 이런 관점에서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동종의 필사본 가운데에서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덕 있는 통치자, 다윗을 닮은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왕권’이라는 관념과 완벽하게 부합된다. 이러한 생각은 경건왕 루이의 시대에 대세였고, 그의 아들 대머리 왕 샤를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는 중세의 왕권 관념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한 단계였다.

5) 『위트레흐트 시편집』에 수록된 166점의 도해는 후기 로마 시대의 사례를 이어받아 새롭게 창작한(카롤링거 양식으로 ‘해석한’) 사례로서 탁월하고 풍부하며 독특한 모티브를 보여주고 있다. 이 사본의 도해는 상아 책 표지가 있는 다른 필사본에 영감을 준 원천 자료이다. 동시대에 현전하는 여러 시편집들은 일반적으로 세 편만을 장식했는데(제1편, 제51편, 제101편) 이 중에서 『트루아 시편집(Troyes Psalter)』과 『두스 시편집(Douce Psalter)』은 『위트레흐트 시편집』에 나타난 묘사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았다. 『대머리 왕 샤를의 시편집』 및 『대머리 왕 샤를의 기도서』 표지로 사용된 상아 역시 마찬가지로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영향이다.

이밖에도 『위트레흐트 시편집』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묘사를 볼 수 있는 현전 필사본은 많다. 특히 『베른 피시올로구스(Bern Physiologus)』 · 『힌크마르 복음서(Hincmar Gospels)』 · 『드로고 성사집(Drogo Sacramentary)』 · 『마드리드 천문학 소책자(Madrid Astronomical Manual)』 · 『레이덴 아라테아(Leyden Aratea, 레이덴 천문학 책자 내의 도해)』 · 『생토르의 복음서(Gospels of Saint-Aure)』 · 『벨텐부르크 복음서(Weltenberg Gospels)』 · 『피어폰트 모건 복음서(Pierpont Morgan Gospels)』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들은 약 830년부터 900년경에 주로 랭스와 메스(Metz)에서 제작되었는데, 이밖에 카롤링거 시대의 채식 사본을 제작하여 내보내는 또 다른 중심지였던 투르(Tours)와 생타망(Saint-Amand)에서 제작되기도 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당대의 중요한 필사본으로서 동종으로서 최초의 것이며 여러 필사본에 영감을 주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상의 여러 필사본에 나타난 도해 및 스타일의 발전을 이해하기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한참 후대인 1000년경에 독일 남부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된 필사본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처럼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후기 로마 예술과 카롤링거 시대의 해석 사이에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1000년경에 캔터베리에 들어온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1000년~1200년까지 영국에서 제작된 시편 중 가장 장식이 풍부한 세 편의 시편, 『할리 시편집(Harley Psalter, 약 1010년)』 · 『에드윈 시편집(Eadwine Psalter, 약 1160년)』 · 『파리 시편집(Paris Psalter, 약 1190년)』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이 세 시편집들도 그 자체로 아름다고 중요하다. 이 시편들은 각각의 방식대로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도상학적 사이클을 적용했으며, 각 사본이 제작된 시대의 스타일에 따라 재설계되었다.

이외에도 『오드버트 시편집(Odbert Psalter)』(999년) · 『불로뉴 복음서(Boulogne Gospels)』(1000년) · 『아렌베르크 복음서(Arenberg Gospels)』(약 1010년) · 『캔터베리 운율 달력(Canterbury metrical calendar)』(11세기 초) 등 캔터베리에서 제작되거나 캔터베리 출신의 화가들이 완성한 사본들에서도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영향과 스타일을 찾아볼 수 있다. 윈체스터에서 제작된 『브장송 복음서(Besançon Gospels)』(약 1030년) · 『엘프와인의 기도서(Prayerbook of Aelfwine)』(약 1030년) 등도 마찬가지이다. 『위트레흐트 시편집』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심오한 예술적 영향을 미쳤던 채식 사본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로버트 코튼(Robert Cotton, 1570~1631)이 『위트레흐트 시편집』를 매입한 후에, 이 필사본은 애런델(Arunde)의 백작 토머스 하워드(Thomas Howard, 1586~1646)에 의해서 네덜란드로 옮겨졌고, 1716년 마침내 위트레흐트 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이 책은 어떤 학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사실상 잠들어 있다가 19세기 중반에 비로소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필사본에는 삼위일체론에 관한 이른바 ‘아타나시오스 신경(Athanasian Creed)’이 쓰여 있다.

당시 성공회(Anglican Church)에서는 신앙고백으로서 ‘퀴쿰케 불트(Quicumque vult, ‘ 누구든지 구원되기를 원하는 자는’이라는 뜻의 아타나시오스 신경의 라틴어 첫 어구로 ‘아타나시오스 신경’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를 포함할 것인지를 논의 중이었다. 당시 일부 학자는 『위트레흐트 시편집』이 4세기에 제작되었다고 보았고, 『위트레흐트 시편집』에 ‘아타나시오스 신경’이 쓰여 있으므로 ‘아타나시오스 신경’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 속한 것이고, 따라서 성공회는‘아타나시오스 신경’을 유지해야 한다고 결정 내렸다.

그런데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가 1872년 처음으로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연대를 6세기로 특정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논쟁이 다시 이어졌고, 결국 영국 의회에서까지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필사본을 위트레흐트 대학교 도서관으로부터 대여한 다음 당시로서는 신기술인 사진 촬영을 통해 사본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역사상 최초로 원본을 촬영하여 영인본(photographic facsimile)으로 제작한 필사본이 되었고, 런던에 고문서학협회(Palaeographical Society)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고문서학협회는 중요한 필사본의 영인본 제작에 있어 선도적인 기관으로 성장하였고, 그리하여 필사본을 더욱 쉽게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1873년에 제작된 『위트레흐트 시편집』 영인본, 그리고 토머스 하디가 1874년 발표한 두 편의 논문을 통해서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제작 연대는 5세기 후반으로 결론 내리게 되었다. 1890년대 이후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제작 연대는 대략 9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에보 시편집』의 시대일 것으로 결론 내려졌지만 이후에도 성공회는 ‘아타나시오스 신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트레흐트 시편집 [Utrecht Psalter]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