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한 金炳淵은 주변의 칭송과 축하를 듣는둥 마는둥 집으로 향했다. 장원급제라는 그 일 자체보다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아들이 장원급제한 것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우리들 삼형제(형 炳夏 아우 炳湖)를 홀로 길러 내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니시던가. 3년이 멀다 하게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시며 밥을 굶어가면서도 자식들만은 잘 가르치려고 매질해가며 글공부를 독려하시던 어머니셨다.
걸음을 재촉하여 집에 돌아오니 예상했던 대로 어머니와 아내 황씨가 초조 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병연은 두손 모아 어머니 앞에 공손히 큰 절을 올렸 고 재빠르게 눈치를 알아챈 어머니와 아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들의 글재주를 아는 어머니는 급제쯤이야 할 줄로 알았지만 장원을 했다 는 말을 듣고는 이미 아기 아버지가 되어 있는 아들의 등을 왈칵 부둥켜안 았다. "너의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느냐" 하고 눈물까 지 글썽이는 것이 아닌가.
감격의 눈물을 참아 낸 어머니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바라던 대로 백일장에서 장원급제를 했으니 이제부터는 서울에 올라가 과거 볼 준비를 하여라. 네 실력이면 어렵지 않게 과거에 급제할 수 있을 것이다. 벼슬길에 나아가 반듯이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병연은 평소에 벼슬길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소위 양반이라 고 거들막대는 서울의 벼슬아치들은 塗炭에 든 백성은 아랑곳없이 당파싸움 과 勢道政治에 여념이 없고, 지방의 守令들은 제 배나 채우고 벼슬자리나 지 키려고 討索질을 일삼고 있으니 그 흙탕물 속에 들어간들 물을 맑히기는커녕 그 스스로의 맑음도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 속에는 그 어떤 숨은 뜻이 있는듯하니 만약 우리 가문 에서 지난날에 누군가가 高官大爵을 지내다가 몰락한 일이 있다면 그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후손된 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 기회에 가문의 내력을 바로 알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짐짓 말머리를 돌려 오늘의 백일장 試題와 장원한 아들의 글을 듣고 싶어 했고, 병연도 기뻐하는 어머니와 아내 앞에서 신바람 나게 휘둘렀던 詩句를 떠올리면서 어깨를 으 쓱하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15,6년 전에 <洪景來 亂>이라고 하는 반란사건이 있었던 것을 어머님은 기억하십니까?" 홍경래라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놀라 가슴이 덜컹 했지만 애써 태연한체하면서 다음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이를 깨닫지 못 한 병연은 예사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 홍경래 난 때 끝까지 충절을 지켰던 가산군수 鄭蓍를 칭송하고 싸워 보 지도 않고 항복한 후에도 비겁한 짓을 꾀하였던 선천부사 金益淳을 탄핵하 라는 시제가 주어졌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익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평소 마음속으로 是是非非를 분명히 했던 소신대로 一筆揮之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해 왔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냐. 그럴 줄 알았더라면 장성한 아들에게 진작 집안내력의 귀띔이라도 해 주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하랴. 아니 그 치욕스런 과거를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었으랴.
그런 줄도 모르고 신명나게 낭송해 가는 아들의 詩를 듣고 있던 어머니는 "너는 죽어 황천에도 못 갈 놈, 거기에는 선대왕이 계시지 안느냐.(魂飛莫向 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아들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풀썩 엎드린 채 목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아들도 며느리도 모두 영문을 몰라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얼마 동안을 흐느 껴 울고 일어난 어머니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와 내 가 함께 조상님께 큰 죄를 지었구나." 그리고는 아직도 영문을 몰라 하는 아 들에게 벽장 속에 숨겨 두었던 작은 책 한 권을 내어 놓았다.
그것은 집의 系譜와 史蹟을 적은 일종의 家族史라 할 家乘이었다. 병연은 바 쁜 손으로 가승을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수십 대를 내려오는 조상들의 빛나 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었고, 끝판에 와서는 金益淳-金安根-金炳淵으로 이어 져 김익순과 자기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아이구 이럴 수가" 병연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통곡했다. 역적의 후손이라니, 울어도 울어도 설움은 자꾸만 복받쳐 올랐다. 역적이든 충신이든 그 어른이 나의 조부님이신 것만은 틀림없거늘 그토록 처절하게 매도하다니 장차 어찌 얼굴을 들고 세상을 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