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불리는 蘭皐 金炳淵(1807~1863),그는 조선조 후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勢道大家 安東金氏 문중에서 태어났다.
TV사극 '명성황후'에 등장했던 金炳冀, 金炳學, 金炳國 등과 같은 炳자 항 렬이요,
그의 아버지 金安根은 荷屋大監으로 불리는 金佐根을 비롯하여 金汶根. 金洙根과 같은 항렬이며, 할아버지 金益淳은 純祖임금의 장인으로서 안동 김씨세도를 창시했던 金祖 淳과 같은 항렬이었다.
그토록 60년 세도가문의 한 허리에 태어나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었을 그가 세상을 등지고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조국산하를 누비면서 숫한 逸話와 名 詩를 남기고 57세를 일기로 비운의 일생을 마친 연유는 그의 할아버지 '金 益淳-正法'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병연이 겨우 다섯 살이던 純祖 11년(1811)에 평안도에서는 '關西푸대접' 을 이유로 한 '洪景來의 亂'이 일어났고 당시 그의 조부 김익순은 그 지역의 한 고을인 宣川府使로 나가 있었는데 불의에 叛軍의 습격을 받은 그는 싸 워 보 지도 못하고 적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平西大元帥라고 자칭한 홍경래는 노도와 같이 일어난 민중을 조직적으로 지휘하여 擧事한지 6일 만에 청천강 이북의 嘉山, 博川, 郭山, 定州, 宣川, 泰川, 鐵山, 龍川 등 8읍을 점령하였으니
그 와중에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밀려난 고을이 비단 선천만 은 아니었다.
그러나 嘉山郡守 鄭蓍 같이 반도에게 포위되어 항복을 강요하는 적으로부 터 양팔이 잘니면서도 인둥이(守令을 상징하는 인장)을 입으로 물고 항복 을 거 부하다가 끝내 목숨을 버리고 節義를 지킨 충신도 있었지만
그 외엔 다른 고을의 수령들도 거의가 선천부사와 다를 바 없었으니 당시 의 상황으로 보아 항복한 것만으로 중형에 처해질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 다.
그런데도 김익순이 壯金勢力의 비호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 고 斬刑에 처해지고 만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그는 저항 없이 적에게 항복하여 순순히 복종하고 협력하다가 전세가 역전되자 叛徒가 흩어지는 틈을 타서 적진을 벗어난 후에 농민이 벤 홍경래의 참모 金昌始의 목을 돈 천 양을 주기로 하고 사서 자기의 전공으로 위장하고서도 약속한 목 값을 주지 않음 으로서 파렴치한 그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김익순은 大逆罪人이 되어 斬首되고 家産은 籍沒되었으며 가족은 겨우 연좌형을 면하여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대역죄인의 아들이 된 아버지 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나니 병연은 홀어머니에 이끌리어 황해도 谷山을 비롯한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깊은 산골 寧越에 찾아 들어 정착했 었나 보다.
寧越郡 河東面 臥石里 속칭 '노루목'에 그의 묘가 있고 거기서 2km쯤 더 들 어가면 그의 모자가 살던 옛 집터가 나온다. 10년 전쯤 내가 그 곳을 찾았을 때는 진입로공사를 하는 중이어서 차를 3km쯤 떨어진 입구에 세워 놓고 걸 어서 들어가야 했는데 지금은 진입로 뿐 아니라 묘역이 말끔히 정비되 어서 하나의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제법 큰 내가 흐르는 산기슭의 양지바른 언덕에 "나는 청산을 향하여 가는 데 푸른 물 너는 어디로부터 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라는 유명 한 그 의 시가 새겨진 작은 빗돌이 하나 서 있고 그 위에 "詩仙蘭皐金炳淵 之墓"라 고 쓰인 자연석묘비와 함께 시인 김삿갓의 무덤이 흘러오는 푸른 물을 바라 보며 조용히 누워 있다.
그의 어머니 함평이씨는 첩첩산중, 노루꼬리만큼 해가 든다고 하여 노루목 이라고 했다는 이 곳에 숨어 살면서 어린 아들에게 가문의 내력을 일체 숨 긴 채 그저 글만 가르쳤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던 병연은 열 살을 전후 해서 는 이미 四書三經을 통독하였을 뿐 아니라 고금의 詩書를 두루 섭렵 하면서 특출한 詩才를 표출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고 한다.
더욱이 영월은 端宗의 莊陵이 있는 곳으로서 端宗哀史가 담긴 비통한 유적 들이 도처에 자리하고 있으며 영월읍을 둘러싼 산봉우리들의 이름마저도 成三問峯이니 朴彭年峯이니 하고 지어 부르는 忠節의 고장에서 經書를 배 우고 史書를 익히면서 그는 불의를 미워하고 節義를 흠모하는 대쪽 같은 선비 가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