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말이 있다. 장씨의 삼남(三男)인지 이씨의 사남(四男)인지 그 신분이나 성명이 분명하지 않다는 말로서 그 출신이 어릿어릿한 평범한 사람을 뜻한다. 장씨 성 과 관련된 말은 이 밖에 또 있다.
장왕이조(張王李趙). 무슨 무협소설에 나오는 제목 같으나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은 장씨, 왕씨, 이씨, 조씨를 말하 는 것으로 평범한 사람이란 것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 다는 말이다. 옛날에 장자능, 왕이도, 이사영, 조성종 등 네 사 람이 모두 정부에서 벼슬을 하고 녹을 받아먹고 있었다. 그래 서 사람들이 장왕이조라고 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벼슬자리에 앉아서 나라의 녹이나 축내고 있었음을 비꼰 말이 아닌가 한다. 한편에서는 이 네 성씨를 가지고 그 우 열을 논하면서 장씨를 갑(甲), 왕씨를을(乙), 이씨를 병(丙), 조 씨를 정(丁)이라 하며, 장갑(張甲) 왕을(王乙) 이병(李丙) 조정 (趙丁)이라고도 한다. 장삼이사가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이라면 다음은 어리석은 사 람이나 우매함 이르는 말들이다. 먼저,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것이 있다.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면서 토끼가 나오기만 기다린다는 말로서, 혼자 착각에 빠져 되지도 않을 일을 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뜻한다. <한비 자> `오두편(五竇篇)`에 나오는 말이다. 한비는 유가 사상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상이라고 혹평 을 했다. 그래서 그는 유학자들에게 들으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송나라에 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밭을 갈고 있는데 토끼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밭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 터기를 들이받고는 머리가 깨져 죽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농 부가 무릎을 탁 치며 생각했다. "가만 있자, 토끼가 저렇게 죽는 것을 보니 기다렸다 주워 담 기만 하면 힘 하나 쓰지 않고 토끼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토끼 가 또 와서 죽을 때까지 그루터기를 지키고 앉아 있어야지." 한참을 지키고 있었지만 농부에게 다시는 그런 횡재가 굴러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을 뿐이다. 한비자의 눈에는 유학자들이 과거 요순(堯舜) 시대에 얽매여 사는 답답한 인간들로 보였던 것이다. 비슷한 말이 `각주구검(刻舟求劍)`이다. 세상의 변화도 모르 고 낡은 생각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 다. 초나라 사람 중에 강을 건너는 자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칼이 배 안에서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급히 뱃전을 깎아 표 시를 해 놓고 말했다. "여기가 내 칼이 떨어진 곳이다." 배가 강가에 멈추니 뱃전을 깎아 표시한 사람이 그 표시한 자 리를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어 칼을 찾았다. 배는 이미 움직여 갔고 칼은 물에 떨어진 채로 그대로 있었으니 이 얼마나 허황 한 짓인가. 옛 법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뱃전을 깎아 칼 을 찾으려는 것과 같다. 시대는 변했건만 법제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이것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식견이 좁음을 나타내는 말로는 `좌정관천(坐井觀天)`이나 `군맹평상(群盲評象)` 같은 말이 있다. 먼저 좌정관천은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면 조금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세상일에 어두운 것을 이르는 말로 한유 (韓兪)의 `원도(原道)`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같은 뜻으로 정저지와(井低之蛙)라는 말을 더 즐겨 쓴다. 정저지와는 <장자>의 `추수(秋水)` 편에 나오는 말이다. 옛 날 중국에 큰 장마가 져서 황하의 누런 물이 범람하여 굽이굽 이 흐르는 모습이 마치 바다와 같았다. 그러자 황하의 신 하백 (河伯)이 득이만만하여 북해에 가서 자랑을 하고 싶었다. 그러 나 북해에 당도한 하백은 그 망망함을 보고 아연실색하였다. 하백은 북해의 신 `약(若)`에게 말했다. "내 일찍이 공자의 견문도, 백이숙제의 의리도, 일소에 부쳤 건만 오늘 당신의 바다를 대하고 보니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엉 뚱하고 어리석은 오판과 자만 속에 살았는지 깨닫겠습니다." 그러자 약이 말했다. "우물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음은 우물에만 있기 때문이요. 견식이 좁은 이에게 도를 말할 수 없음은 상식 적인 가르침에만 매여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이제 좁은 강물 기슭에서 나와 북해를 맞이함으로써 자신의 보잘것 없음을 깨달았으니 당신과는 천하의 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이 오." `군맹평상(群盲評象)`은 여러 맹인이 코끼리를 평한다는 뜻 으로, 사물을 자신의 주관과 좁은 소견으로 그릇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나라에 왕이 있었다 어느 날 왕이 대신에게 명했다. "코끼리를 끌어내어 맹인들에게 각각 만져보게 하라!" 그리고는 맹인에게 물었다. "그래, 코끼리는 무엇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상아(象牙)를 만져본 맹인이 대답했다. "코끼리는 무와 같습니다." 머리를 만져본 맹인은 말했다. "코끼리는 돌과 같습니다." 코를 만져본 맹인은 말했다. "코끼리는 방아공이와 같습니다." 다리를 만져본 맹인은 말했다. "코끼리는 나무토막과 같습니다." 등을 만져본 맹인은 말했다. "코끼리는 널판지와 같습니다." 코끼리는 부처님을, 맹인은 중생을 비유한 것이다. 즉, 모든 중생들에게는 각각의 부처가 따로 계시다는 것이다. 남의 의견이나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견백동이 (堅白同異)`라는 말을 쓴다. `단단한 것과 흰 것은 서로 엇갈린 다`는 뜻으로, 자기가 아는 것만을 옳다고 주장한다는 말이다. <순자> `수신(修身)`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돌을 보기만 하고 만져보지 못한 사람은 단단한 것을 알지 못한 채 돌을 희다고만 하고,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돌을 만져보 기만 한 사람은 그 흰 것을 알지 못하고 돌은 단단하다만 하니, 이것은 단단하다는 것과 희다는 것이 끝내 하나로 합칠 수 없 음이다." 이 `견백동이`라는 말은 `궤변(詭辯)`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데 이는 전국시대 때 공손용(公孫龍)이라는 사람이, "눈으로 보면 희나 단단하지는 않고 손으로 만지면 단단하나 희지는 않으니, 단단한 돌과 흰 돌은 같은 물건일 수가 있다." 고 궤변을 늘어놓은 데서 비롯된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귀와 눈이 열려 있어야 한다. 무슨 말 이든 새겨 듣고, 무슨 일이든 잘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귀와 눈 이 닫혀 있는데 어찌 배울 수 있으며 지혜를 얻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모르는 바를 묻는 데 부끄럽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기자(問奇字)`라는 말이 있다. 기이한 글자를 보고 무슨 글자인지 물어본다는 뜻이다. 중국 한나라 때 양웅(揚雄)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도인 (成都人)으로서 자(字)는 자운(子雲)이다. 일찍이 생각하기를 경전은 <주역>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여 `태현(太玄)`을 짓 고, 전(傳)은 <논어>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여 `법언(法言)` 을 짓고, 역사(歷史)는 창힐(倉頡)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여 `훈찬(訓簒)`을 지었다. 또 잠(箴)은 <우잠(虞箴)>보다 더 큰 것 이 없다고 하여 `주잠(州箴)`을 지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지식 은 한없이 넓지만 갈 것이 당연하였다. 아마 중국 역사상 전고 (典故)와 고사를 양웅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양웅에게는 기이한 글자를 가지고 와서 묻는 사람 이 많았는데 특히 유분이라는 사람이 글자를 물을 때마다 술 한 병을 가지고 와서 물었으므로 그 일을 가리켜 기이한 글 자를 묻는다는 뜻으로 `문기자(問奇字)`라고 하였다. <한서(漢書)>에 나오는 얘기다. 예로부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문 (文)`이라 하여 학문의 길로 생각하였다. 보통 시호를 지어줄 때에 `문(文)` 자가 들어 있는 사람들은 학문을 한 선비라는 것 을 이 말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묻기는커녕 아무리 성현들의 귀한 말을 전해 주어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이동풍(馬耳東風)`은 `우이독경(牛耳讀經)`이란 말과 같 은 뜻으로 쓰인다. 남의 비평이나 의견은 조금도 듣지 않고 곧 흘려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건 무관심하여 듣지 않았다는 뜻의 비유적 표현이다. 마이동풍은 이백이 `왕십이(王十二)의 추운 밤 홀로 잔을 드 니 회포가 있다에 답함`이라는 시 가운데 나와 있다. 시의 제목 이 말해 주듯이 이 시는 왕십이라는 친구가 `추운 밤 홀로 잔을 드니 회포가 있다`라는 시를 보내온 데 대해서 이백이 답으로 쓴 것인데 길고 짧은 구절을 섞어 상당한 장시로 되어 있다. 왕십이가 자신의 불우함을 이백에게 호소한 듯하다. 이백은 이에 대해서 달 밝은 겨울밤에 홀로 잔을 들고 있는 완십이의 쓸쓸함을 생각하여 이 시를 지었던 듯싶다. 이백은 술을 마셔 만고의 수심을 떨어 버리기를 권하고, 또 훌륭한 인물은 지금 세상에는 맞지 않음이 당연하다고 위로했 다. 또 한탄하는 말로 자기의 인생관을 읊었다. 지금 세상은 투계(鬪鷄)ㅡ당나라에서는 왕후 귀족들이 투계를 즐 겼다ㅡ의 기술이 뛰어난 자가 천자에게 귀염을 받고 길거리를 으 스대며 다니거나, 아니면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 얼마간의 공을 세 운 자가 최고의 충신인 듯이 뻐기는 것이다. 자네나 나나 그러한 인간을 흉내 낼 수는 없다. 우리는 북창에 기대앉아 시를 읊고 부 를 짓는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큰 걸작이라 하더라도 지금 세상 에서는 그런 것은 한 잔의 물 값도 되지않는다 아니 그뿐인가. 세상 사람은 이를 듣고 모두 머리를 저으니 동풍이 말의 귀를 흔드는 것과 같도다. 이렇게 이백은 비분해 하였다.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걸작에 는 머리를 흔들며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은 동풍 이 말의 귀에 부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원래 중국은 무(武)보다 문(文)을 숭상한 나라였다. 문의 힘 이 한 나라를 기울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는 것이라는 자랑 과 자신이 전통적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었다. 더구나 이백과 같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시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시인의 말 에는 마이동풍이다. 그래서 이백은 이렇게 계속했다. 어목(魚目)이 나를 웃으며 명월(明月)과 같기를 바란다. 즉, 고기 눈이나 다름없는 어리석은 자들이 우리들을 비웃으 며, 명월의 구슬 같은 지위에 앉으려 하고 있다. 옥과 돌이 함께 섞여 있고,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이 지금 세상이라고 이백은 말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우리 시인에게는 높은 벼슬 같은 것은 애당초 상 대가 아니요, 젊을 때부터 우리는 산야에 초연함이 소원이 아 니었던가 하고 왕십이를 격려하며 시를 끝맺고 있다. 어리석거나, 우매하거나, 식견이 좁거나, 편협하거나, 고기 눈을 가진 사람보다 더 구제하기 힘든 사람이 있다. 바로 `사이 비(似而非)`다. 사이비란 겉으로는 그럴 듯하면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을 말한다. <맹자> `진심하(盡心下)`편에 실려 있는 이 말은 맹 자의 제자 만장(萬章)과의 문답에 나온다. 만장이 어느 날 맹자 에게 물었다. "한 고을 사람들이 다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어디를 가나 훌륭한 사람이 아닐 수 없을 것인데 공자께서 그 런 사람을 `덕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 까?"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게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구실 이 없으나 세상 풍속을 따르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하여 집에서 는 마치 성실하고 신의가 있는 것처럼 하고 밖에 나가서는 청 렴한 것처럼 하니 사람들이 다 그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나 그런 사람과는 요순의 도에 함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이비한 것을 미워한다. 강아지풀을 미 워하는 것은 그것이 곡식의 싹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 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정 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아악을 혼란시킬 까 두려워서이고, 보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 색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향원(鄕原)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 사이비는 구제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공자가 지적한 대로 우 리 사회를 좀먹고 있는 사이비들이 무섭기까지 하다.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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