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소는 죽림칠현 중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위나라 중산대부 (中散大夫) 해강의 아들이다. 해소는 열 살 때 아버지가 무고한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래, 어머니를 모시고 근신의 생 활을 해 왔다. 아버지의 친한 벗인 칠현의 한 사람 산도(山濤) ㅡ아버지 해강은 죽음에 즈음하여 해소에게 산도 아저씨가 있 으니 너는 고아가 아니니라 했다ㅡ가 당시 이부에 있었는데 무 제에게, "강고(康誥 ; 서경의 편명)에, 부자간의 죄는 서로 미치지 않 는다 하였사옵니다. 해소는 해강의 아들이기는 하오나 어질기 가 춘추의 대부 극흠보다 나을망정 못하지 않사오니, 바라옵건 대 돌보아 주시어 비서랑으로 임명하여 주옵소서." 하고 이뢰었다. 그랬더니 무제는, "경이 말한 대로 하면 승이라도 시킬 수 있겠소. 낭으로 할 것 없이‥‥‥." 하고 비서랑보다 한 계단 위인 비서승으로 관에 임명했다. 해소가 처음 낙양에 올라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 람인 왕융(王戎)에게, "어제 사람들 틈에서 처음으로 해소를 보았는데, 기상이 좋 고 맵시 있어 독립불기(獨立不羈) ; 독립하여 아무도 억누를 수 없음)의 학이 닭의 무리 속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융은, "자네는 도대체 그 사람의 아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했다고 한다. 즉, 해소의 부친은 더구나 그러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 나왔다. 해소는 얼 마 후에 여음의 태수가 되었고,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를 하 고 있던 배위는 해소를 소중히 여겨, "해소를 이부의 상서로 한다면, 천하에 이보다 더 뛰어난 영 재는 없을 것을‥‥‥." 하고 늘 말했다. 해소는 이렇게 하여 혜제 곁에 있으면서 직언을 올리는 몸이 되었다. 제왕 경이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해소가 의논할 일이 있어 왕에게 나아가니 왕은 몇몇 신하와 주연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신하들이 해소가 악기를 잘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거문 고를 가져오게 하여 왕이 해소에게 뜯어보라 하였다. 그러자 해소는 왕에게 정중히 아뢰기를, "왕께서는 나라를 새로이 하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실 분이 아니십니까. 저도 미흡한 자이오나, 천자를 모시고 조복을 입 고 궁중에 있는 터이옵니다. 악기를 들고 어찌 광대의 흉내를 낼 수 있겠사옵니까. 평복으로 사사로운 연석이라면 사양하지 않겠사오나‥‥‥." 하며 면박을 준 일도 있었다. 영흥(永興) 원년, 8왕의 난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왕은 하간 왕(河間王) 웅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도망치게 되었는데, 해소가 부름을 받고 행재소(行在所)에 달 려 간 것은 왕의 군사가 탕음(蕩陰)에서 패했을 때였다. 해소는 모두들 도망해 버린 뒤에 홀로 의관을 바로 하고 창과 칼이 불꽃을 일으키는 어차(御車) 앞에서 몸으로 왕을 감싸며 지켰다. 그리고 드디어 빗발치는 적의 화살에 맞아 왕의 곁에 서 쓰러져 선혈로 왕의 어의를 물들였다. 왕은 깊이 슬퍼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근시(近侍)들이 왕의 의복을 빨려 하자, "이것은 해시중의 충의의 피다. 씻어 없애지 말라." 하며 옷을 빨지 못하게 했다. 처음에 해소가 왕에게 가려 했 을 때 같은 시중인 진준(秦準)이, 이번 난리 속에 가려면 좋은 말을 타야 할 텐데 말은 가졌 소?" 하고 물었는데, 해소는 얼굴을 굳히며, "폐하의 친정(親征 ; 왕이 몸소 정벌에 나섬)은 정(正)으로 역 (逆)을 치심이라, 어디까지나 정벌이지 어찌 난리라 하겠소. 폐 하를 경호함에 실패했다면 신하의 충절이 어디 있을 것이며, 빠른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라고 말했다. 이 말은 들은 사람 누구나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 었다. <진서. `해소전`에 전하는 얘기다. |
......^^백두대간^^........白頭大幹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