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이야기

말을 하면 논설이 되고, 붓을 대면 문장이 되다.

eorks 2013. 10. 5. 00:04
고전(古典) 이야기 ~수련과 성찰~

말을 하면 논설이 되고, 붓을 대면 문장이 되다.
<삼국지(三國志)>는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관중이 쓴 소설로서 <삼국지>이고 또 하나는 중국 역 사책인 <삼국지>가 그것이다. 보통 학술적으로 쓸 때는 역사책 을 말한다.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식(曹植)은 문장력이 대단히 뛰어 났다. 아마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인가 보다. 조식은 나이 열 살 때에 이미 글을 지었다. 태조가 일찍이 그의 문장을 보고,
"이 글은 누가 대신 지어주었느냐?"
하였다. 조식이 꿇어앉아 대답했다.
"말을 하면 논설이 되고 붓을 대면 문장이 됩니다. 어찌 남의 것을 빌려왔겠습니까. 당장 이 자리에서 시험해도 좋습니다."
일찍이 형인 문제(文帝)는 조식의 솜씨가 미워서 죽이려고 했다. 그리하여 조식을 불러 일곱 걸음 걸을 동안 글을 지으라 고 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콩잎을 삶아 국을 끓이고
콩물을 짜서 죽을 쑨다
. 본래는 같은 뿌리인데
어찌 이렇게도 급하게 졸여대는고?
하니 문제는 매우 부끄러웠다. 바로 그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다. 또, 여기서 나온 말이 뛰어난 글재주를 뜻하는 `칠보지 재(七步之才)`다.
중국 역사상 뛰어난 글재주로 칭송을 받는 이가 한둘이 아닌 데, 수많은 문장가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당나리의 대문 호 한유(韓愈)다. 자(字)는 퇴지(退之), 한문공(韓文公)이라고 도 한다. 고아 출신인 그는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 인습에 얽 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문체 때문에 평가를 받지 못하고 낙방 했다. 그 후 스물다섯 살 때 진사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으나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하자 유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한 일로 중앙 정치에서 밀려난 이후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그는 일찍이 대학 (大學)에 나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한 바 있다.
"세상에서 높은 벼슬을 얻지 못하더라도 과직의 불공평을 얘 기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자신의 학문이 부족함을 책망하고 이 를 계기로 더욱 정진하는 자세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님은 사적으로는 학문에 있어서 대문장가에 필적하며 인격에 있어서도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데 공적으로는 사람들 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친구들의 도움도 없이 자칫 죄를 받으 니 언젠가는 파멸을 초래하여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형국입 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선생님이 어찌 제자들에게 처세의 도 를 논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한유가 말했다.
"공자나 맹자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은 그들과 같은 성인에 비할 바가 아닌데 도 나라의 녹(祿)을 먹으며 편히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다. 그러 므로 사람들로부터 때로는 헐뜯음을 받고 악한 이름을 받는 것 이 이상할 것이 없다."
그의 대표적인 <원도(原道)> . <원성(原性)> 등은 중국문학 의 백미로 꼽히고 있으며, 후에 한유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칭 송하는 말이 기록에 전한다.
"시(詩)가 빛나는 것은 아래로 장자(莊子)와 굴원(屈原)의 이 소(離騷)에 미치고,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공정 은 같되 곡(曲)은 달리 한다_동공이곡(同工異曲)_."
한유와 비교되는 인물로 제(齊)나라 때 좌사(左思)라는 문장 가가 있다. 그는 한유와는 달리 당대에 크게 각광을 받은 입지 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는 학문도 잘하지 못헸고 북과 거문고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러나 부친의 격려에 힘을 얻어 열심히 공부 를 하게 되었다. 그는 얼굴도 못나고 말도 더듬었으나 한번 붓 을 들면 그 글귀의 장려함이 비할 데 없었다.
그는 사람 만나는 것도 피하며 창작에 몰두하여 1`년이나 걸 려서 `제도부(齊都賦)`를 썼다. 이것을 완성했을 때 그는 다시 `삼도부(三都賦)`를 쓰고 싶은 욕망이 솟았다. 삼도라 함은 촉, 오, 위의 서울을 말하는데 세 수도의 모습을 생각나는 대로 부 (賦)로 읊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해서 낙양으로 이사한 것을 기회로 그는 이 일에 전력을 쏟기 시작했다.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좌사는 그 일에 정성을 기울였 다. 방 안이나 뜰에도 붓과 종이를 준비해 두었다가 갑자기 좋 은 생각이 떠오르면 놓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적어두었다.
이렇게 하여 십 년 후 `삼도부`가 마침내 완성되었으나 아직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얼나 후에 이름 높은 시인 장 화(張華)가 우연한 기회에 이 부를 읽게 되었다. 장화는 그 구 상이 웅대하고, 그 환상이 화려함에 놀랐다.
"이건 반(班) . 장(張)의 것과 다를 바 없이 좋은 글이다."
후한 때의 대시인 반고(班固)와 장형(張衡) 두 사람의 대 시 인에 비교해 칭찬한 것이다. 그의 칭찬에 `삼도부`의 소문은 삽 시간에 퍼져서 고관과 귀족들이 다투어 그것을 베끼려 들었다. 그 즈음의 책이란 아직 인쇄술이 나오기 전이라, 오직 베껴 만 드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부`를 베끼려 드는 사람이 불어 나자 종이가 불티날 듯 팔려 드디어 낙양의 종이 값이 오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누군가의 저서가 세상에서 큰 칭찬을 받아 잘 팔리 는 것을 가리켜 `낙양의 종이 값이 오른다(→낙양지가귀 ; 洛陽紙價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진서> `문원전(文苑傳)`에 전하는 얘기다.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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