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골면려(刻骨勉慮)`는 뼈를 깎는 정성으로 생각에 온 힘을 쏟 는다는 말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온 정성을 다 기울인다는 뜻 이다. 흔히 두보의 시풍을 이를 때 이 말을 쓴다. 거의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뚜렸한 대별(對別)을 보인 천재 를 들라면 서양에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동양에서는 이백 과 두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백과 두보는 시대 를 초월한 천재 시인이라는 점 외에는 사상, 생활, 시풍 등 어느 한 가지도 공통된 점이라고는 찾아 보기 힘들다. 이백이 호방 표일(豪放飄逸 ; 탁 트여서 내키는 대로 행동함)한 그의 시풍처 럼 술 한 잔 걸치고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시를 써 갈기는 선 천적 천재라면, 두보는 그야말로 글자 하나하나를 뼈를 깎듯이 다듬고 다듬어서 쓰는 노력하는 천재랄 수 있다. 또한 이백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시를 주로 읊는 낭만적이고 도교적인 시인이었다면, 두보는 탄탄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뒤 숭숭한 세태 속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과 함께 시대의 아품을 대변한 사실적이고 유교적인 시인이었다. 이백을 시선(詩仙), 두보를 시성(詩聖)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시를 쓰는 스타일도 달랐는데, 이백은 절구체(絶句體) 의 시를 잘 썼고, 두보는 율시체(律詩體)의 시를 잘 썼다. 굳이 누가 더 뛰어난 시인인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두보 의 시풍은 학문을 하거나 성취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교훈 을 준다. 천재 시인의 뼈를 깎는 노력을 보면서 자신을 성찰하 고 의지를 북돋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보(杜甫 ; 712~770)는 중국시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 꼽힌다. 사회의 온갖 부조리한 모습을 고발하고 고민하는 넓이 와 깊이에 있어서, 또한 예술의 완숙도에 있어서도 두보가 이 룩한 수준을 넘는 시인은 거의 없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삶 에서 기울일 수 있는 온갖 노력을 시가 창작에 쏟아 부었다. 이 런 이유로 시인 두보는 시의 성인(→시성 ; 詩聖)으로, 그의 작 품은 시로 쓴 역사, 즉 시사(詩史)로 불린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 당나라 현종(玄宗)의 치세 기간에 태어나 대종(代宗)의 통치 기간에 사망할 때까지 58년을 살았 다. 이 반세기는 근 300년 가까이 되는 당의 역사로 볼 때 극성 기에서 쇠락기로 급변하는 시기였다. 755년에 발생한 안사(安史)의 난은 그 주요한 계기가 된다. 극성과 쇠락의양극을 경험 하고 실제로 전란으로 인해 끊임없이 떠돌아야 했던 그의 인생 은 삶 자체가 고단한 비극이었지만 이것이 진정한 예술 창작의 근원이 되었다.
사별하면 다만 울음 삼키고 말지 생이별은 언제까지나 비통하다. 강남은 풍토병 많은 땅 쫓겨난 그대는 소식이 없구나! 옛 친구 꿈속에 나타나니 그대 그리는 내 마음 알아주는 듯, 그대 지금 그물에 걸려 있으니 어찌 자유로울 수 있으랴. 생시의 혼백이 아닌가 두렵지만 길이 멀어 생사를 추측할 수 없구나. 그대 혼백이 돌아오면 강남 풍경 생기 나고 그대 혼백이 돌아가면 이곳은 암흑. 지는 달 빛 처마에 가득하니 그대 모습 빛나고 있는 듯 물 깊고 파도 거세니 교룡에게 잡아먹히지 마시게.
10여 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장자인 이백에 대하여 두보는 언제나 존경과 함께 애뜻함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두보 자신의 신세도 남을 위로하기보다는 남에게 위로 받아야 할 처지면서 이백이 유배 길 떠났다는 소식에 꿈에서라도 만 나고픈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해 냈다. 꿈속의 이백은 마치 달 빛을 몰고 다니는 듯, 그 발자취 따라 시의 화면에는 환한 불빛 이 켜졌다 사라진다. 관포지교(管鮑之交)와는 다르지만 이백과 두보 두 천재 시인의 우정도 현대에 한 번 곱씹어 볼 가치가 있 지 않을까?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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