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하나가 스적스적 산길을 더듬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울창한 숲 속의 풍경은 여기저기서 울어대는 새 소리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 가히 선경이라고 해도 좋았다.
"허어, 저런 것이!"
선비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길가에 있는 큰 서낭나무를 바
라보았다.
본래 서낭나무에는 온갖 울긋불긋한 천 조각들이며 지승(紙繩)
들이 매어져 있게 마련이지만 색다른 것이 하나 더 있었기에 선
비가 두 눈을 크게 뜬 것이었다.
그것은 짚으로 만든 조그만 꼭두각시였다. 그런데 노랑저고리
와 파랑 치마까지 해 입힌 그 꼭두각시가 가느다란 노끈으로 목
이 감긴 채 얕은 서낭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꼭두각시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떤 놈이 저토록 무서운 저주를 하는 것일까?"
선비는 그 꼭두각시를 노려보다가 그쪽으로 걸어가 그것을 잡
아 뜯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손을 그대로 끌어들이면서 중얼
거렸다.
"하긴 저런 저주를 할 까닭이 있어서 저렇게 했겠디. 세상에는
별 음탕한 계집들이 다 있으니까. 주인을 꼬여 꼬리치는 종년이
없나, 시아비와 짝이 된 과부 며느리가 없나…… 계집들이란 정
말로…… 아니, 하긴 사내녀석들도 마찬가지지."
선비는 저주를 할 테면 하라는 듯이 다시 오솔길로 빠지며 산
위를 향해 바윗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선비는 동고(東皐) 이준경(李俊慶)이었다. 서울 장안에서도
이름 있는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그 때까지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밤 꿈자리가 너무나 사나워 성 밖으로 소풍이나 나간다는
것이 내친 걸음에 전부터 면식이 있는 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절간에서 하룻밤 쉬며 이야기나 실컷 나누면 울적해진 심사가 좀
풀어지지 않을까 해서였다.
"별안간 웬일이십니까?"
"음……자네에게서 설법을 들어 속세에서의 때를 씻어 버리려
고 왔네."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천하에서 첫손가락에 꼽히시는 대문장
(大文章)께서 소승에게 설법을 들으시다니요. 자, 어서 이리로 올
라오십시오."
중은 동고를 안내하여 법당 앞마루에 마주 앉았다.
"자네 불문에 귀의한 지 몇 해나 되는가?"
"네, 한 삼십여 년 됩지요."
"삼십여 년이라! 한 세대가 지났군 그래. 옛말에도 면벽 십 년
(面壁十年)이면 도를 깨닫는다고 했는데, 삼십 년이 지났으니 이
젠 깨우쳤겠구먼."
"저처럼 평범하고 천한 자가 삼십 년 아니라 삼백 년 있어 봐
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억만 겁(劫)의 윤회(輪廻)속에 빠져
들 뿐입죠."
"여보게, 윤회라는 게 정말로 있단 말인가?
"그야 부처님의 말씀이니 추호인들 틀릴 리가 있습니까? 전생
(前生)과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의 삼생(三生)뿐이 아니라 생생
세세(生生世世)로 무궁한 윤회를 거쳐야 합죠."
"그럼 나뿐 인간이 죽으면 정녕 요귀 같은 것으로도 된단 말이
지?"
"그야 그럴 수도 있습죠."
불가의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몰라서 새삼스럽게 묻는 것이 아
니었다. 지난밤 꿈 속에 찾아와 자기를 괴롭히던 여인은 필경 죽
은 혼의 요귀인 것만 같아 다시금 그렇게 물어 본 것이었다. 중
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여자는 정말로 죽어서 요귀가 되었음이 틀
림없는 것만 같았다.
"이 사람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데 그따위 요귀가 있다
고 해도 어찌 사람에게 범접할 수야 있겠는가?"
"그야 공불이색(供佛異色)이니 그럴 수도 있겠습죠."
"그럼 색과 공의 세계가 각각 구분되지 않는단 말인가?"
"구분한다는 그것부터가 색계에 떨어진 것입니다. 색이고, 공이
고, 삼계유심(三界唯心)이오니 오직 마음에 달려 있는가 하옵니
다."
"오직 마음이라……음!"
동고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오늘은 심사가 좀 불편하신 모양이시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
으셨나요?"
"아니."
그러면서도 동고는 어지러운 속마음을 감추지 못해 자세를 바
로잡지 못하고 몸을 일부러 좌우로 흔들어 댔다.
모든 게 오직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고는 하지만 그 마음이라
는 게 도대체 종잡을 수 없었다. 풀밭에 내놓은 송아지처럼 멋대
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람에 좀체로 한 군대에 붙잡아 매어
둘 수가 없었다.
더욱이 요즘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일 때문에 우울증
까지 생겼는데 표독스럽게 생긴 이상한 계집애가 꿈속에 나타나
욕지거리를 퍼붓고 간 다음부터는 도저히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
었다.
동고는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총명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하지 않은 게 없는 자질을
가졌고 붓끝이 떨어지는 곳마다 주옥같은 문장이 쏟아져 나와 시
문(時文)으로서도 누가 감히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 인물과 문
장을 꼽게 되면 으례 동고가 그 중에서 으뜸이었다.
나이 이십 전에도 과거 따위는 우습게 여기며 언제고 응시만
하면 장원 급제는 문제없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를 볼 생각도 하지 않으며 이
십이 넘도록 앞날의 대성(大成)을 위해 책 속에 파묻혀 밤을 새
워 공부만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공부도 할 만큼 했고 맘들의 기대도 크고 하
니 청운(靑雲)의 벼슬 자리에 올라서리라 마음먹고 첫 번 과거에
참여하였는데 뜻밖에도 그는 낙방거자(落榜擧子)가 되고 말았다.
남들도 저 사람은 당연히 되려니 했던 것인데 정작 떨어지고 보
니 동고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낙심하지 않고 다음 번에 다시 시험을 치렸는데 또
떨어졌다. 동고는 적이 초조롭고 불안하기 짝이 없게 되었다. 선
비로 글만 읽고 있을 때엔 명성을 떨쳤는데 두 번씩 과거에 창피
를 당하고 보니 사람들을 대하기가 스스로 부끄러웠다.
세 번째 과거에서도 그는 미끄러졌다.
때문에 맥이 탁 풀리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자기 딴에는 온 힘
을 다하여 치른 시험이었는데 장원은커녕 급제권 내에도 들지 못
하고 보니 다시는 과거에 참여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선비로 태어나 수십 년 동안 공을 들여 글을 읽은 것도 하루
아침에 용문에 올라 품고 있던 생각대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의 큰 뜻을 이루어 보기 위해서였는데 벼슬길에 처음으로 나서기
도 전에 그처럼 가시밭에 딩굴고 돌뿌리에 채여 넘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다시 책을 펼쳐 볼 마음도 무료한 나날을 술과 벗
하여 비분 속에서 지내오고 있었다. 전날밤에도 역시 술을 잔뜩
마시고 나서 책상을 두드려 가며
"하늘이 이준경일 이대로 망쳐 버린단 말이냐? 아니지! 하늘이
장차 큰 일을 이사람에게 맡기실 때가 올 거야……"
하고 웅얼거리다가 한바탕 웃었다가 한 줄기 울분의 눈물도 흘려
보고 하면서 술을 마시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데
"이놈…… 준경아, 이리 나오너라!"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문 밖을 내다보니 머리를 헝클어 늘어뜨
린 젊은 여인이 치마폭을 질질 끌면서 뜰 한복판에 우뚝 서 있다
가 그를 보더니 눈에서 살기를 뿜으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네가 아무리 인물이 잘나고 문장이 뛰어나도 쓸데없어! 네까
짓 게 무슨 사내 대장부냐? 죽으면서까지 애걸하는 한 계집의 원
도 풀어 주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못 되는지 두고 보겠다.
이놈아!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내 목숨을 돌려 줘! 내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려면 평생 동안 낙방거자 노릇이나 해라! 이놈아!"
하고는 팔을 허우적대는 것이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아 깜짝 놀
라다 보니 어지러운 꿈이었다.
사나운 꿈에서 깨어나 보니 온몸에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에잇! 고약한 것! 분명히 그 아전놈 딸의 꿈이야. 꿈 속에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혀……"
문득 지난 봄의 일이 머리에 떠오르자 그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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