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기호는 냇가로 목욕을 하러 갔다가 깜짝 놀라 몸을 돌
렸다. 버드나무 가지가 물 위로 축 늘어진 웅덩이에 들어앉은 하
얀 여자의 나체가 보였기 때문이다. 옆모습으로 보았는데, 늘어진
젖이며 어깨의 살이며 약간 앞으로 솟은 아랫배의 하얀 살결이
기호의 숨을 멎게 했다. 냇물이 맑아서 물 안에 담근 하체가 완
연히 보였고 기호가 보는 줄 모르는 여인은 앞도 가리지 않은 채
두 손으로 물을 끼얹어 대고 있었다.
기호가 놀라 몸을 돌리고 무서운 것에서 도망치기라도 하듯 달
려갈 때 비로소 이상한 기척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버드
나무 가지 사이로 뒷모습을 본 그녀는,
"에구머니나!"
하면서 온 몸을 시뻘겋게 물들었다. 더구나 그 사나이가 자기와
중신 말이 있던 기호라는 것을 알고서는 더욱 가슴이 콩볶듯이
뛰었다. 중신 애비는 기호가 거절하더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
고서는 두고 생각해 보자고 했다고 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어째, 이를……"
하고 더욱 얼굴을 붉혀 간 것은 바로 살구나무집 과부였다. 그
뒤로 기호도 살구나무집 과부도 왜 그런지 자꾸만 상대방의 모습
이 떠올라서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 밤 살구나무집 과부의 딸이 기호를 찾아와 조그만 보
따리를 놓고 갔다.
"어머니가 갔다 드리랬어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횡하니 달아나 버렸다. 간 다음에
펴 보니 그것은 옷이었다. 새로 지은 깨끗한 명주옷 한 벌이었다.
이튼날 기호는 그 옷보따리를,
`옷은 있으니 염려 말라. 뜻만은 고맙게 받았다.`
는 말과 함께 살구나무집으로 돌려 보냈다.
"아니, 받아 두면 어때서 그런가? 과부는 정성들여 만든 것인
데……"
"내가 뭔데 남의 과부 옷을 받아 입어. 난 곧 철새처럼 떠날
사람이니까."
그러면서도 기호는 떠나지 않고 그냥 머물렀다. 여름이 끝나가
던 어느 날이었다.
장마가 진 후에 과부의 딸이 냇가에 나갔다가 격류에 휘말려
들어가서 순식간에 깊은 바위소까지 떠내려가고 말았다. 마침 냇
가에서 몇 사람이 천렵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누렇고 급히 흐
르는 물결 속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기호는 매끄러운 돌이 냇바닥에 온통 깔린 물 속으
로 뛰어 들어갔다. 매끄러져 쓰러지면서 헤엄치면서 정신을 잃은
계집아이를 끌어안고, 소까지 떠내려갔다가 헤엄쳐서 그 아이를
구해 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과부집에서 닭을 두 마리 잡고 술을 담가
보내왔다. 기호는 그것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곧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도 기호는 늘 유 서방네 주막집에 들렸고, 언제나 똑같이
술을 달라는 것과 셈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을철이 되었다.
사방에서 추수가 시작됐다. 일손이 모자라게 되어 살구나무집
은 콩을 뽑아야 할 때가 됐는데도 뽑지 못했다. 콩 말고도 할 일
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사늘해지고 첫서리가 내려
도 콩밭에 손을 못 댔다. 장정 하루 품이면 될 일인데도…… 두
번째의 서리가 내린 날, 근심이 되어 산굽이 하나를 돌아 저쪽에
있는 콩밭을 보러 간 과부는 깜짝 놀랐다. 콩들이 깨끗이 뽑혀
다발 다발로 묶여서 낟가리 세 개로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번에 기호가 해 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슴이 뭉클해지
며 눈에서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바쁜 틈에도 다시 닭을 잡
아 추수 농주로 담아 놓은 술과 함께 그에게 보냈다. 과부의 마
음은 기호에게로 확 쏠려 버렸다. 기호가 대답을 미루면서도 자
기에게 뜻을 두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슴 설레이는 밤들이 계
속됐다. 그러나 가을이 깊어가는 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
음이 달아오른 그녀는 급기야 사람을 놓아 어서 같이 살게 되도
록 해 달라고 빌게끔까지 됐다.
그런 무렵의 어느 날, 기호가 괴나리봇짐을 지고 유 서방네 술
집에 나타났다.
`오늘은 무슨 결판을 내려나보다.`
가슴이 철렁해진 언년이는 방에 앉아 있었는데 마침, 함께 있
던 유 서방의 등 뒤로 숨으며 오들오들 떨었다.
유 서방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 이 뜨내기 놈이 과부와의 혼담
을 마다하는 이유가 이제 보니 자기 소실(少室)에게 마음을 두어
그랬구나 싶어,
"무슨 일이야? 엉? 무슨 일이야?"
하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러자 기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알게 되오. 언년이 좀 이리 나오지."
그러나 언년이는 더 등 뒤에 바싹 붙어 버렸다.
"그러면 그대로 들어도 좋아. 다 내 탓이었어. 내가 그 밥을 먹
고 그 연장을 쓰면서도…… 금이 나왔을 때 나는 뒤늦게 그래서
야 당신이 왜 마을에 안 가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어. 나 때문에
당신이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어. 그 때는 굴 파기에만 환장을 해서 아무 것도 몰랐지
만…… 여기 당신 몫의 금덩어리가 있어. 이건 당신 몫이니까
아무 말 말고 받아 둬. 나는 평생 이 동네에서 살면서 당신이 행
복해지는 것을 보며 살아가려고 했는데 살구나무집 과부 때문에
안 되겠어. 어디를 가더라도 돈이 될 게 좀 있으니 나는 여생을
걱정 없이 살겠지. 당신이 있는 동네에서 과부하고는 살 수가 없
어. 그래서 떠나는 거야. 공연히 생사람 마음만 달게 할 수도 없
구."
기호는 품에서 커다란 주머니에 넣은 돌같이 묵직한 것을 방
안으로 던져 넣었다.
유 서방은 입을 멍하니 벌렸고 언년이는 `흑` 하고 느끼면서
유 서방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기호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정이 비로소 왈칵 솟아올랐다.
기호는 몸을 돌리더니 터벅터벅 걸어갔다. 유 서방은 그를 불
러서 무슨 말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입만 멍하니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년이는 언제까지나 흐느끼면서 울기만 했고 금덩어리 주머니
는 방 안에 나뒹굴고 있었다.
"당신과 사고 싶은 마음은 태산보다 더하오. 그러나 주막집의
소실이 내 아내였소 내 아내의 가슴이 아파질 일을 못하겠소. 마
음이 괴로워 멀리 떠나니 용서해 주오."
이런 말을 전하고 걸어가는 기호의 눈에는 언젠가 냇물에서 본
과부의 그 하얀 몸이 밟혀서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옷을 지어 보내던 과부의 마음씨가 가슴으로
파고들어 무엇인가 귀중한 것을 뒤에 두고 가는 심정이어서 발길
이 자연 더뎌졌다.
이십 리를 갔을까 말았을까. 마악 언리재를 넘을 때 뒤에서 누
군가가 할딱거리면서 쫓아왔다. 돌아다보니 얼굴이 빨갛게 물든
살구나무집 과부였다.
"아니!"
반가움이 왈칵 치솟았다. 앞에까지 다가온 과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말씀하신 것은 잘 알아 들었어요. 그러면, 우리 가대를
팔아 이사하여 살면 되잖아요."
하고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주겠소? 그러나 남편의 무덤이 있는 동네를 떠나는 것
은…… 나도 그런 생각은 해 보았지만, 그래서 말 못한 거요."
"그야 무슨 날에 오기만 하면……"
"그렇군. 어디 가까운 동네에서 살면 되겠군. 우리 함께 여생을
보냅시다. 내게 어지간한 밑천은 있소 남에게 과히 괄세 안 받고
살 만한 밑천 말이오."
기호는 과부의 손을 쥐었다. 과부의 손은 불길처럼 뜨거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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