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 자리 하나 없겠습니까? 그저 뼈가 부러지도록 일하겠습
니다. 사경은 주셔도 좋고 안 주셔도 좋으니……"
곡식이 누렇게 익은 가을철, 신도(神道) 마을의 박 참판(朴參
判)댁 대문 앞에 나타나 일을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하는 총각이
있었다. 마름은 그의 아래 위를 흝어보았다. 헌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얼굴과 손에는 때가 묻어 영락없는 거지 꼴이지만 눈동
자가 까맣게 빛나는 것이 웬만큼 영리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경은 안 받아도 좋다니, 그러면 그냥 수고를 해 주겠
다는 거냐?"
"그저 입 하나 얻어먹고 잠자리만 얻으면 됩니다."
박 참판은 마름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자 즉시 그를 불러들였
다. 호조(戶曹)참판까지 지내다가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고 있는
박 참판은 마음이 부드럽기 짝이 없어, 동네에서도 조정에 신사
(臣仕)할 때에도 원수를 진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불러들여 놓고 보니 마름의 말처럼 얼굴의 생김새며 눈이며 장
부다운 것이, 만약 씨만 좋았더라면 한 자리 단단하게 할 것 같
아 보이는 녀석이었다.
"내 집에 있도록 해라.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지는 모르겠
다만, 사경도 줄 것은 주어야지. 내 알아서 할 테니 염려하지 말
아라."
그래서 복쇠(福釗)는 그 집의 머슴이 되었다.
그 날부터 그는 정말로 뼈가 부러지도록 일했다.
박 참판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큰 딸은 일랑, 둘째 딸은 이랑
이었다. 나이는 열 아홉 살과 열 일곱 살. 그런데 어머니가 달랐
다. 이랑은 지금의 후처(後妻)인 국씨 부인(鞠氏 婦人)의 몸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언니, 이번에 새로 들어온 머슴 놈, 아주 못 돼먹었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그 눈이 마치 독수리의 눈깔 같아서. 한 번
혼을 내줘야겠어."
이랑은 일랑에게 입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일랑은 공연한 트
집을 잡아 생사람 잡지 말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어째서 그러는 것인지 이랑은 복쇠를 잡아먹지 못해 야
단이었다. 그녀는 결국,
"어머니, 복쇠 녀석이 사람을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아요."
하고 헛고자질을 했다. 국씨 부인은 영악하기로 소문이 난 여자
였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그리고 하인배들까지,
`박 참판같이 착한 양반이 어쩌다가 저런 영악한 여자를 만났
누. 하늘도 무심하지.`
하고 수군대고는 했다. 그런 여자였으니 자기 배에서 태어난 딸
이 그런 말을 하니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박 참판이 나들이를
나간 날 그녀는 즉시 하인들을 불렀다.
"복쇠녀석이 세상에 몹쓸 죄를 지었다. 그 녀석이 감히 우리
이랑이의 얼굴을 음흉한 눈으로 훔쳐 보았다니……"
하고 내 뱉더니 당장 그놈을 잡아다가 곤장 찜질을 하라고 추상같
은 명령을 내렸다.
안마당 대청 앞에 붙잡혀 온 복쇠는 임시로 급히 만든 형틀에
엎어진 채, 국씨 부인의 호령을 따르면서 볼기의 뼈가 부러지도
록 얻어맞았다. 쉰 대를 맞을 때가 되자 엉덩이는 걸레쪽처럼 되
었고 거기에서 흘러나온 피는 마당에 개울을 이루었다.
음흉한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해명해 보았자 핑계로 인정되고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서 말없이 그 같은 곤욕을 당했지만
이랑이 그렇게 자기를 잡아먹지 못해 하는 까닭을 아무리 생각해
도 알 수 없었다.
겨우 생각해낸 것은 올 봄에 산에 일하러 갔다가 이름 모를 붉
은 꽃이 하도 탐스럽게 피어 있어서 꺾어다가 안채의 비녀인 유월
이를 시켜, 큰 아씨 방에 꽂아 드려라고 들여 보낸 일 뿐이었다.
`옳지, 어쩌면 그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월이 년이 어쩌다가 이랑에게 들켰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랑이 화를 내서 모함할만도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언니인 일랑이 말했을까?`
그러나 일랑은 그런 말을 할 아가씨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듬
직하고 그리고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자란 탓인지 늘 우수
가 깃든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입이 가벼
운 여자는 아니였다.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 이것을 꺾어다 드
리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어서 그만 앞뒤 생각 없이 한 노릇이었
는데 그것이 자기를 이 꼴로 만든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복쇠의 추측은 맞았다. 이랑은 우선 그렇게 모함해서 복쇠를
반죽임시켜 놓은 후에 어머니 국씨 앞에서 그 사실을 털어놓았
다.
"유월이 년이 예쁜 꽃을 가지고 언니 방으로 가길래, 달라고
했더니 언니에게 드릴 것이라면서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년이 언제 산에 갈 틈이 있어나요? 어쩐지 이상해서 캐물었더
니 복쇠녀석이 꼭 언니에게 갖다 드리라고 했다잖아요. 꽃을 뺏
어서 팽개치긴 했지만 분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어디 감히 머
슴 주제에, 어디라고 함부로……"
유월은 복쇠의 멀끔한 주제에 반해 공연히 마음을 태우던 참이
라, 그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했었던 것인데, 그것이 그만,
그런 화를 갖다 안겨 주고 만 것이다.
"저런 괘씸한 놈! 곤장 쉰 대로는 당치도 않구나. 당장에 몰고
를 내야지."
당장에 무슨 요절이라도 내고 말 것같이 부르르 떨던 국씨 부
인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옳지! 옳지! 옳다꾸나!"
하고 말하면서 무릎을 쳤다.
그녀는 복쇠가 겨우 일어나서 걷게 되자, 어느 날 그를 불러들
여,
"후원을 좀 쓸어라."
하고 명령했다.
복쇠가 후원을 반쯤인가 쓸었을 때였다.
갑자기 후원에서 국씨 부인의 찢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게 누구 없느냐? 없느냐?"
그 소리에 놀란 안채의 계집 비녀들이 쪼르르 달려가 보니 부
인은 서슬이 퍼래진 얼굴로,
"빨리 행랑채 놈들을 불러와라!"
하고 재차 명령을 내렸다. 마당을 쓸던 복쇠는 갑자기 안채에서
부인이 후원으로 돌아와 그렇게 소리를 질러 대는 바람에, 웬일
인가 싶어, 하던 비질을 멈추고서 바라보았다.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국씨 부인이 소리쳤다.
"당장 저 복쇠놈을 잡아 묶어라!"
복쇠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몸으로 묶여 버렸다.
"왜 이러십니까? 마님, 쇤네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부인 앞에 끌려온 복쇠가 말하자 그녀가 내뱉었다.
"이런 뻔뻔스러운 녀석 같으니, 겁도 없이 일랑에게 꽃을 바치
지 않나, 이번에는 후원을 쓸라고 했더니, 글쎄 일랑이의 방에 들어
가지를 않나……"
"마님, 그게 무슨 억울한 말씀이십니까. 쇤네가 감히 어디라고
일랑 아씨의 방에……"
복쇠는 어이가 없었다.
그 소리에 놀라 별당채에 기거하던 일랑이 밖으로 나왔다.
우수에 깃든 그 고운 얼굴로 조용히 걸어와서,
"어머님, 복쇠는 그런 무엄한 짓을 한 일이 없사옵니다."
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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