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성경과 보습을 들고

eorks 2015. 10. 22. 07:39
학교법인 동서학원 설립자 장성만 박사의 1인 3역
역  경  의   열  매
성경과 보습을 들고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게으른 민족은 절대로 
    잘살 수 없다. 우리는 땀을 흘려야 한다. 자립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1965년, 드디어 그리운 내 고향 부산에 도착했다. 미국인 친구들 의 말처럼 이제부터 고생의 시작이었다. 학교를 세울 아무 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꿈과 비전만 초 롱초롱 빛났다. 강원도에서 사역하던 레쉬 선교사가 유일 한 동반자였다. 우선 과수원을 하다가 그만둔 땅을 구입해 학교 건물인 알파홀을 짓기 시작했다. 레쉬는 바위를 깨뜨리고 블록을 찍는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레쉬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학교 건축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역사적인 학교 사업의 시작이었다. 내가 교장을, 레쉬가 교감을 맡았다. 나는 설립 허가를 얻기 위해 서울과 부산 을 무려 36번이나 왕복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 운영 방법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 었다.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면 무인가로 운영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규제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교육을 충분히 시 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레쉬 선교사는 처음부터 `무인가`를 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인가를 받지 않으면 졸업생들의 취업이 어렵습니다. 학 생들이 자부심을 갖고 공부하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학생들의 장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인가로는 그 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생각에 차이가 있 을 뿐이었다. 목표는 동일하나 그것을 성취하려는 방법이 달랐다. 한번은 잠을 자는데 빗소리가 들렸다. 곧 폭우가 쏟아지 기 시작했다. 그때가 새벽 2시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학교 건물 공사를 하는 곳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길을 내주지 않으면 산 아래 주민들이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 빨리 물길을 내주어야 한다.` 삽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비틀거리며 올 라갔다. 이미 빗물이 범람해 마을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 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나님, 학교를 지켜 주세요. 만약 건물을 짓다가 주민 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덕을 세 우지 못합니다. 도와주세요." 칠흑 같은 어둠과 폭우가 손전등 불빛을 삼켜 버렸다. 학 교는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지고 있었다. 만약 공사장에 물이 차올라 산사태라도 나면 큰일입니다. 폭우를 맞으며 산길을 올라갔다. 순간 발을 헛디뎌 심하게 고꾸라졌다. 나는 흙탕물에 휩쓸려 한참 동안 미끄러졌다. 낭떠러지에 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할 수 있 었다. 커다란 바위 위에 겨우 몸이 걸렸다. 조금만 더 떠내 려갔으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할 뻔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믿 음을 주세요. 소망을 주세요.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폭우 속에서 드린 간절한 기도였다. 그것은 일종의 절규 였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새삼 깨달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사장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폭우 속에서 밤새도록 삽으로 물길을 터주는 작업을 해야 만 했다. 다행히도 새벽녘에 비가 잦아들고 아무런 사고 없이 날이 밝았다. 이런 숱한 시련들을 딛고 첫 건물인 알파홀이 드디어 완 공됐다.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일이 가능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 니라:(빌립보서 4장 13절) 우여곡절 끝에 건물이 완공됐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인가도 나지 않은 학교에 과연 학생들이 얼마나 찾아올 것 인가, 더구나 당시에는 인문계를 숭상하는 풍토가 지배적 이었다. 기술자를 양성하는 실업계 학교는 가난하거나 성 적이 신통치 않은 학생들이 가는 곳쯤으로 치부되던 시절 이었다. 나는 트럭을 몰고 부산, 경남 일대를 순회했다. 주로 극 장, 예식장, 교회에서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우리나라도 곧 기능사회로 변합니다. 따라서 기술을 배 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최고 의 기술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학비는 걱정하지 말고 응 시하십시오. 여러분의 꿈을 우리가 실현시켜 줄 테니 우리 를 믿으십시오." 첫 입학식이 열렸다. 학생은 총 19명. 주로 부산·경남 지역에서 강연을 듣고 찾아온 젊은이들이었다. 교육 슬로 건은 `성경과 보습을 들고`였다. 교훈은 `근면·자립·협동 ·신앙`으로 정했다. 이것이 2년제 초급대학의 첫 출발이었다. 내가 가사를 만들고, 부산대 이상근 교수가 곡을 붙여 교가도 만들었다. "낙동강 굽어보는 민석대 위에 진리의 이상탑이 우뚝 서 있네 새 시대 새 일꾼을 길러나가는 아! 그 이름 경남공업전문대학 근면 자립 협동 신앙 우리의 학훈 만방에 펼치자 공대 경남공대" 내가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적인 삶이었다. 학교 에 입학했을 때는 불신자였으나 졸업할 때는 기독교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도록 지도했다. 나는 학교의 섭립자이며, 교수이며, 경비원이었다. 뭐든 지 닥치는 대로 감당했다. 이런 정신이 우리 민족에게 정 말 필요한 시기였다.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도 바로 그 점 이었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게으 른 민족은 절대로 잘살 수 없다. 우리는 땀을 흘려야 한다. 자립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학교를 설립한 이듬해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시작됐 다. 우연찮게 새마을운동의 정신은 `근면·자조·협동`이었 다. 우리 학교의 교훈4가지 중 `신앙`만 빠진 셈이다. 그래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말하곤 한다. "당신의 학교가 새마을운동의 3대 정신을 모방했군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박정히 대통령이 우리 교훈을 빌려 간 것이겠지요."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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