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談.野史.說話

공민왕이 오장깃대를 꽂았던 곳이다.

eorks 2019. 10. 19. 00:14
野談 ♡ 野史 ♡ 說話

공민왕이 오장깃대를 꽂았던 곳이다.
    『공민왕과 모후실 순천설화 / 설화』 “똘이야! 똘이 어딨니?” 밥 때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똘이를 찾다 똘이 엄마도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조그만 아 이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어흥’ 하면서 엄마를 놀래켰다. 하지만 익숙한 듯 똘이 엄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재미없었는지 똘이는 마루에 올라 밥을 게 눈 감추 듯 말아먹고는 또 다시 밖으로 나갔다. 똘이가 막 동구밖을 향해 달려나가는데 멀리서 뿌연 먼지 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였다. 시골마을에 웬 병사들 일까? 똘이는 의아했지만 이내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마을 앞 개울을 따라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연신 뒤를 힐 끔힐끔 돌아봤다. 처음 보는 병사들의 옷차림이 제법 화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누군가와 부딪힐 뻔하였는데 그 사람이 똘이를 잡아주었다. “고마...”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똘이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너무도 멋있게 생긴 아저씨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에서 병사들이 달려들어 똘이를 저지하려 하 였다. 너무 놀란 똘이가 순간 흠칫 하며 물러섰다. 그러자 똘이 앞에 있던 사람이 뭐라 손짓을 하니 모두들 물러났다. 지체 높은 귀인이 잠시 쉬기 위해 행차를 한 듯 싶었다. 처음 본 더벅머리 아이가 똘똘해 보였는지 귀인도 똘이가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걸었다. “어딜 가는 중이니?” 나지막하지만 너무나 근엄한 목소리여서 똘이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저 밑에서 피라미를 잡으려고요.” “피라미?” 귀인은 신기하다는 듯 똘이를 따라나섰다. 호위병들이 만 류하였지만 뿌리치고 똘이와 함께 개울로 내려간 귀인은 똘이가 피라미 잡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 하였다. “이걸 뭐하러 잡니?” “탕을 끓여 먹으면 맛있어요.” 똘이는 피라미도 모르는 귀인이 한심하다는 투로 대답하 였다. 그 귀인이 이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을 똘이가 알게 된 것은 며칠 지나서였다. 마을 사람들도 처음에는 서울의 귀족이 요양 차 내려온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왕대(王垈)마을이라 불렀다. 왕대마을에 왕의 거처를 마련한 병사들은 마을 뒤 나복산 (蘿蔔山)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고 오 장깃대를 꽂았다. 멀리서 보아도 위엄이 서린 깃발이었다. 공민왕이 피난을 올 때 어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어머니를 모신 마을을 모후실(母后實)이라 불렀고, 나복산 이름도 모후산(母后山)이라 새로 이름지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모후실을 후곡마을로 개명하였다. 왕대마을과 모후실은 직선 거리로 약 1.2km쯤 떨어져 있는 데, 왕대마을과 모후실을 잇는 골짜기를 빈골이라 부른다. 공민왕의 호위 장수들이 왕과 모후의 연락을 취하기 위해 밤중에 말을 타고 이 골짜기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그곳에 는 부싯돌로 쓰이는 돌들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말을 달릴 때마다 돌들이 부딪혀 불꽃이 튀는 바람에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기에 돌들을 한쪽으로 모두 치우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을 차돌백이라 부른다. 어느 날 왕이 모후에게 들러 문안을 여쭈는데 모후가 왕에 게 특별히 차려줄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였다. 그러자 왕이 문득 똘이 생각을 하고는 병사들을 시켜 마을 앞 개울에서 피라미를 잡아오라 시켰다. 그리고는 마을 아낙에게 탕을 끓이게 하여 맛을 보았는데 왕은 물론 모후도 흡족해 하였 다. 그래서 모후실에서는 피라미를 왕등어라 부른다. 낚시 를 해도 잡히는 고기가 왕등어밖에 없는데, 왕의 밥상에 올랐다 하여 왕등어라 부른다는 것이다. 지금도 순천시 송광면 왕대마을 뒷산에는 커다란 바위에 5개의 구멍이 정교하게 뚫려 있다. 직경이 다섯 치(치는 한 자의 10분의 1로서 약 3cm)이고 깊이는 여섯 치 가량 된다. 공민왕이 오장깃대를 꽂았던 곳이다. 또한 공민왕이 왕대마을에 도착하기 전 잠시 머물렀던 마 을은 ‘머무를 유, 서울 경’ 해서 지금도 유경(留京)마을이 라 한다. 모후실(후곡마을)에서 조계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타 나는 가장 높은 봉우리 이름이 살피봉인데, 접근해오는 적 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망을 서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공민왕이 안동에 피난 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모후 산 일대로 피난 왔다는 사료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안동의 지명이 복주(福州)였고 화순군 동복의 옛 이름 역 시 복주(福州)여서 지명의 혼동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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