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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의 능파정의 우정

eorks 2019. 11. 10.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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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의 능파정의 우정
    『이순신과의 능파정의 우정 곡성설화 / 설화』 곡성군 석곡면 능파마을(凌波)은 임진왜란 당시 신대년(申 大年) 5형제가 세웠다는 능파정에서 마을 이름이 비롯되었 다. 능파마을 뒤 달봉 기슭에는 보성강이 굽이쳐 흐른다. 신대년은 신숭겸 장군의 후손이다. 1519년(중종14년) 곡성 신씨 시조인 신세달(申世達)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대년은 선조 즉위년인 1567년 49세의 늦은 나이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한다. 둘째 동생 신대수(申大壽)는 형보다 3년 빠른 1564년(명종19년)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현 감을 지냈다. 아래로 신대춘(申大春), 신대충(申大?), 신대 림(申大臨)이 있다. 신대년 5형제는 과거에 급제한 후 고향 곡성에 작은 정자 를 만들어 이름을 능파정(凌波亭)이라 불렀다. 그런데 5형 제 모두 다들 나이가 들어 사람들은 능파정을 오로당(五老 堂)이라고도 불렀다. 능파는 파도 위를 걷는 것 같다는 뜻 으로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이르는 말인데, 속세의 번뇌를 다 잊고 선비의 도를 닦기 위래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능파정은 진사 신대년의 별서(別墅)1)로 임진왜란 때 이순 신 장군이 왔다 하여 유명한 곳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을 당시 이순신 장군은 삼도 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되고 백의종군하고 있었다. 그때 후임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이에 이순신 장 군은 합천에 위치한 도원수부로 권율 장군을 방문한다. 8월 3일, 이순신은 선전관 양호가 가져온 삼도수군통제사 재임용 교지를 받게 된다. 기복수직교서라고 불리는 이 교 지의 내용은 선조의 사과로 시작하여 장군에게 조선 수군 재건을 당부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교지를 받은 이순신 장군은 그 날로 발길을 재촉해 구례로 가서 손인필 3부자와 이원춘 현감 등을 만나 왜군을 물리칠 작전회의를 하였다. 구례를 떠나 장군이 옥과현에 들렀는데, 옥과현감인 홍요 좌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화가 난 이순신 장군이 벌을 주려하자 그때서야 현감이 나왔다고 난중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8월 7일 오전, 옥과를 출발하여 순천으로 가는 길에 강정 (능파정)에 들러 신숭겸 장군의 후손인 신대년 형제들과 밤새 시국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2) 1519년생인 신대년은 1545년생인 이순신과는 26년 차이가 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신대년과 이순신의 교분이 있었 던 것일까? 1567년 진사가 된 신대년은 이미 관직에 나가 있던 동생 신대수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있는 한 여곽에서 우거(寓 居)3) 했던 적이 있다. 1572년, 별과 응시 중에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진 이순신 (당시 28세)이 낙담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순신 역시 과 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여 여곽에 머무르던 중이었다. 한창 낙담하여 코를 빠뜨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순신에게 다 가왔다. “젊은이, 무슨 일인데 그리 낙담을 하고 있는 겐가?” 이순신이 아픈 다리를 만지고 있다가 올려다보니 점잖은 선비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 그 동안 열심히 무예를 닦았는데 그만 낙마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이순신의 다리를 보니 정말 퉁퉁 부어 있었다. “솜씨는 별로 없지만 시골에 살다보니 생활 방편으로 응급 조치에 대해서는 조금은 아는 편인데, 어찌 내게 맡겨보겠 는가?” 그러더니 대답도 듣기 전에 그 선비는 이순신의 다리를 만 지더니 이리 저리 돌려도 보고 문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더 니 어디선가 대나무를 가져오더니 이리저리 쪼개고 다듬고 하여 이순신의 다리에 대고 헝겊으로 칭칭 동여매었다. 과거에 낙방하여 실망도 실망이지만 다리가 부러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이순신은 낯선 선비의 도움으로 응급조 치를 하게 되어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저는 아산에서 올라 온 이순신이라 합니다. 어르신은 어디 사시는 누구신지요?” “나는 곡성현 석곡에서 올라 온 진사 신대년이라 하네. 보 아하니 크게 될 젊은이 같은데, 언제든 기회가 되면 찾아 오게.”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헤어진 지 4년 만에 이순신은 무 과에 급제하게 된다.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은 문득 곡성의 신대년 어른이 생각났다. 살아 계실까? 17년 전에 만났을 때도 초로의 나이였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무작정 석곡으로 신대년을 찾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대년은 물론 그 5형제가 모두 있었다. 그들은 강가에 능파정을 지어 그곳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오래 전에 만난 젊은이가 정읍현감이 되어 나타나니 신대 년도 깜짝 놀랐다. 현감이 된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17년 전 딱 한 번 만난 자신을 기억하고 백 리도 넘는 길을 달려온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그 날 밤 여섯 사람은 밤새도록 시국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이 차이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때로는 어지러운 정국에 대해 걱정도 하면서, 때로는 서로에 대해 칭찬과 격려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헤어진 지 8년 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다시 곡성에 나타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대 년의 나이 이미 팔십을 바라보는데 여전히 정정하게 이순 신 장군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8년 전 그 날 밤을 생각하면 서 여섯 사람은 다시 시국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을 하였다. 8년 전에 했던 걱정대로 왜적들이 이미 강토를 유린하였고 정유년을 맞이하여 다시 쳐들어왔으니 당장 시급한 것은 이 전쟁을 어떻게 끝맺는가 하는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이 전쟁을 빨리 끝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친을 맺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최근의 정황에 대해 설명하자 신대년이 나 이에 걸맞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데야 누가 반대하 겠소. 하지만 이 전쟁은 우리가 지고 있는 전쟁이 아니라 이기고 있는 전쟁이오. 비록 칠천량에서의 패배가 아쉽기 는 하지만 이제라도 다시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 으니 확실하게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이오.” 신 진사의 단호한 말에 힘을 얻은 이순신이 말했다.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시는 우리 강토를 넘보지 못하도록 이번에 확실하게 끝장을 내야 합니다. 고맙습니 다.” 모함을 받아 투옥도 되고 백의종군도 한 마당에 명나라와 조정의 방침에 반기를 드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명나라의 화친 정책에 맞장구를 쳐서 강토를 유 린한 왜놈들을 곱게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밤새 신대년 5형제로부터 지혜를 구한 이순신 장군은 순천 을 거쳐 여수에 있는 통제영으로 가서 명량대첩의 쾌거를 이룬다. 곡성군 석곡면 능파리에 능파정 터가 남아 있는데, 지금은 코스모스 축제장으로 변해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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