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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박문수와 용소

eorks 2019. 11. 11. 00:05
野談 ♡ 野史 ♡ 說話

암행어사 박문수와 용소
    『암행어사 박문수와 용소 구례설화 / 설화』 구례군 토지면 문수마을은 계곡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여름철 비가 많이 내리면 유리알처럼 투명한 계곡물이 포 말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모습에 절로 더위를 잊게 한다. 그래서 여름철에 문수 계곡 일대는 피서객들로 인산인해 를 이룬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조선시대 때 일이다. 살기 좋은 문수마을에 언젠가부터 흉년이 들기 시작하였다. 먹고 살 기도 팍팍한데 연이어 흉한 일들이 일어났다. 먹고 살기가 팍팍하니 인심이 사나워지고,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끼 리 다툼도 잦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날은 뉘집 소 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느니, 또 어떤 날은 뉘집 닭이 떼 죽음을 당했다는 등 흉흉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좋지 않은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자 일 부 마을 사람들은 아예 마을을 떠나기까지 하였다. 비록 심기가 불편하여 다투기는 하였지만 이웃이 마을을 떠나면 마음이 아프기는 매 한 가지였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어 서 마을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연명하다시피 겨우 겨우 살 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허름한 복장의 선비가 한 명 찾아 왔다. 행색을 보니 몰락한 양반 같은데, 그래도 제법 학식 은 풍부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으로 나그네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보아 하니 학식이 풍부한 것 같은데, 우리 마을에 흉년이 들고 흉한 일들이 끊이질 않으니 무슨 대책이 없겠소?” 그러자 나그네가 좌중을 둘러보더니 말하였다. “사람 사는 일인데 대책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원인을 모 르니 대책이 없는 법, 원인만 파악하면 대책이야 식은 죽 먹기지요.” 자신만만한 나그네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벌써부터 일 이 다 해결된 것처럼 좋아하였다. 그래서 없는 형편에도 막걸리에 감자며 곶감 등을 내왔다. 시장하던 차에 거나하 게 술과 안주를 먹은 나그네는 취기가 도는지 저만치 걸어 가더니 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믿었던 나그네가 음식만 축내고 잠 에 곯아떨어지자 마을 사람들이 당황하였다. “저 양반 혹시 허풍 아냐? 괜한 술과 음식만 축낸 것 같은 데?” 마을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자 다들 기다리다 못해 화가 났다. 그래서 나그네를 흔들어 깨웠다. “아니, 이보슈! 이런 날강도 같으니라구. 문둥이 코에서 마 늘 빼먹는다더니 대접만 받고 이 무슨 짓이오!” 그러자 나그네는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급할 게 뭐요.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오. 그럼, 어디 마 을이나 한번 둘러볼까?” 그러더니 나그네는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보다가 용소에 이르렀다. 용소에 도착한 나그네가 용소의 맑은 물을 보더 니 깜짝 놀랐다. 보기 드물게 맑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그네가 깜짝 놀란 것은 단지 물이 맑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용소의 맑은 물에서 용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 다. 나그네는 용소 앞 바위에서 정좌한 채 한 동안 묵상을 하 였다. 한 시진 가까이 묵상을 하던 나그네가 벌떡 일어나 더니 마을 사람들에게 커다란 붓을 가져오라 하고는 바위 에 세심(洗心)이라는 글씨를 휘갈겼다. 그리고는 마을 원 로를 불러 용소에서 제를 지내라 일러 주었다. “이 소에는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한이 서려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탓이지요. 그러니 이무기의 한을 달 래는 제를 지내야만 마을에 흉한 일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다만, 제를 지낼 때는 반드시 살아 있는 돼지를 잡아 그 피 를 바위에 칠한 후 용소에 던져야 합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가운데 성질 급한 이가 나서서 말했다. “그럴 것 없이 지금 당장 해봅시다. 선비의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말투로 보아 만약 안 되면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이왕 제를 지낼 것, 하루라도 빨리 지내자 하여 즉석에서 돼지를 잡아 제를 지냈다. 나그네가 말한 대로 돼지 피를 바위에 바르고 산 채로 용소에 던졌다. 그런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내심 기대를 하던 마을 사람들이 아까운 돼지만 날렸다고 점차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마을 장정들 일부는 나그네를 노려보 면서 마치 행패라도 부릴 분위기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뇌성번개가 치면 서 신기하게도 비가 내렸다. 처음에는 반신반의 하던 마을 사람들은 나그네에게 거듭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나그 네에게 행패를 부리려던 마을 장정들은 멋쩍은 웃음을 지 었다. 마을 원로가 나그네에게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하 였다. “이 고마움을 어찌 갚아야 할까요? 은공의 이름이라도 알 려주십시오.” “하하하, 무지렁이 이름은 어디다 쓰려고 물으십니까? 보잘 것 없지만 제 이름은 박문수라 하오.” 놀랍게도 나그네는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였다. 마을 사람들은 박문수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다. 마을 원로가 박문수에게 말하였다. “어사 나으리, 이 은혜는 우리 마을이 있는 한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마을 이름을 문수마을이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마을을 문수마을이라 불 렀다고 한다. 박문수(朴文秀·1691~1756).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박 향한(朴恒漢)이고, 어머니는 문경공(文敬公) 이세필(李世 弼)의 딸이다.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에게서 배웠 다. 1723년(경종 3년)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듬해 병조정랑에 이르렀으나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탈관직을 당했다. 1727년 영조가 당쟁을 조정하고자 소론을 등용한 정미 환국 때 사서로 다시 기용되었고, 같은 해 9월 영남 암행어 사로 나갔다. 1728년 부교리를 겸하던 중 이인좌(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뽑히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 대사간·도승지 등을 지내고, 이듬해 호남어사로 나 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1732년 선혜청당상, 1733년 예조참판·대사헌을 지냈 으며, 1734년 형조참판·호조참판에 오르고 진주부사 (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37년에는 도승지·병조 판서가 되고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 왔으나,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 받아 풍덕부사로 물러났다. 1739년 형조판서를 거쳐 함경도진휼사로 경 상도의 곡식 1만 섬을 가지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송 덕비가 세워졌다. 1742년 병조판서, 1745년 어영대장, 1748년 호조판서, 1750년 판의금부사, 1751년 예조판서 겸 세손사부 (世孫師傅), 1752년 한성판윤 등을 두루 지냈다. 1752년 내의원제조로 있을 때 왕세손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1753년 풀려나와 예조판서· 우참찬에 올랐다. 그는 소론계열의 인물이면서도 당론의 폐해를 비판하고 당색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 암행어사 때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 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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