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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을 쥐고 태어난 아이

eorks 2019. 11. 13. 00:13
野談 ♡ 野史 ♡ 說話

구슬을 쥐고 태어난 아이
    『구슬을 쥐고 태어난 아이 곡성설화 / 설화』 조선시대 초 전라도 창평군에 우성해(禹性海)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도 많았지만 음주가무 와는 거리를 둔 채 치산(治産)을 잘 해 젊은 나이에 우성해 는 거부가 되었다. 아무런 부러움도 없을 것 같은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10대 후반에 은(殷)씨 처녀와 혼인을 하여 몇 년 만에 겨우 얻은 딸 하나만 보고 살았는데 그 딸이 시집을 안 가려 하 기 때문이다. 우성해의 딸은 적적해하실 부모님을 생각하 여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시집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 스물이 다 되어서야 우성해의 딸은 낙안의 주 (朱)씨에게 시집을 갔다. 시집을 안 가고 노처녀로 지내는 것이 오히려 더 불효라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딸이 노처녀가 될까 걱정하던 우씨 부부는 막상 딸을 떠나보내 고 나니 집안이 너무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시집을 보내고 나니 더 걱정이었다. 매일 금이야 옥이야 끼고 살던 딸을 시집보내고 나니 집안 에 아무리 부리는 하인이 많은들 딸이 떠난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다. 대궐 같은 큰집에 우씨 부부 두 사람만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탁발승이 우씨 집 대문을 두드렸다. 평소에도 우씨 댁은 인심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딸이 떠난 후로 우씨 부부는 더욱 더 나그네 대접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래야만 딸의 빈 자리를 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심이 후한 주인 부부 덕에 시주를 많이 받게 된 탁발승이 합장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려다 멈칫하였다. 주인 부부의 얼굴에 근심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혹, 무슨 근심이 있나요?” 조심스레 물어보는 스님의 말에 우씨 부부는 그러려니 하 고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스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집은 큰데 의지할 사람 이 하나 없군요.” 그리고는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그러자 우씨 부부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쳐나가 스님을 붙잡았다. “스님,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그렇게 물어놓고도 우씨 부부는 멋쩍은 듯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다. 딸이 출가한 빈자리 때문에 적적해 하는 마당에 방법이라니 무슨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출가한 딸이 되돌아오기를 바랄 수도 없는 일. 그래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서려는 우씨 부부에게 스님이 이야기를 꺼냈다. “늦둥이를 가지면...” 그 말을 듣고 우씨 부부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니, 이 나이에 무슨...” 그래 놓고도 부끄러웠는지 다시 두 사람은 고개를 떨구었 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스님이 놀라운 이야기를 하 였다. 옥과에 있는 성덕산 관음사에 가서 관세음보살께 백 일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돌아간 후 며칠 동안 우씨 부부는 그 일에 대해 서 로가 언급하기를 꺼려하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 지만 남사스럽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하루는 아내가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백일기도 이 야기를 꺼냈다. 남편 역시 내심 바라던 바라 흔쾌히 허락 하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백일기도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던 날 밤 아내의 꿈에 흰옷 입은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스르르 방 안으로 들어오더 니 오색이 찬란한 구슬 한 개를 아내의 품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그대의 정성이 지극하여 훌륭한 아들이 점지되었다. 그러나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이름을 지어주지 말아 야 한다. 장차 어떤 노승이 와서 이름을 지어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여덟 살이 되어 우연히 집을 나갈 일이 있으 니 그리 알라.” 곧 태기가 있어 마침내 아들을 낳으니 우씨 부부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아기는 아버지를 닮아 얼굴이 시원하게 잘 생겼으며 골격도 튼튼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흠이 있었 는데, 날 때부터 왼쪽 손을 펴지 못하고 꼭 쥐고 있는 것이 다. 이른바 조막손이었다. 꿈에서 이야기한 대로 우씨 부부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 이름을 짓지 않는 것도 찜찜하였지만 그렇다 고 꿈에서 경고한 것을 어기자니 더 찜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이야 나중에 지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지냈다. 늦둥이를 금이야 옥이야 하고 살았으니 세월이 흐르는 물 과 같았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다. 그러던 어 느 날 노스님 한 분이 찾아와 우씨를 만나고자 하였다. 우씨를 만난 노스님이 대뜸 이야기를 꺼냈다. “이 댁에 세상에 보기 드문 보배가 있는 줄 알고 왔는데 볼 수 있겠습니까?” “보배라구요? 저희 집에는 그런 보배가 없는데요?” 그때 마침 아이가 들어왔다. 아이를 본 스님이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스님이 손을 내밀자마자 아이가 날 때부터 쥐고 있던 왼손 을 펼치는 것이 아닌가. 아이의 손에는 오색 영롱한 구슬이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을 보주(寶珠)라 하십시오.” 그래서 아이는 태어난 지 5년 만에 보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스님이 돌아간 후 우씨 부부는 근심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러준 대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3년 후에는 보주가 집을 나간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행복이 피어나면 작은 근심은 묻히는 법. 우씨 부부는 이름 그대로 보배처럼 귀하고 총명한 보주를 보면서 보주가 집을 나간 다는 이야기를 잊고 말았다. 보주의 나이 여덟 살 되던 해, 은씨 부인은 보주를 데리고 낙안에 시집 간 딸의 집을 가게 되었다. 몇 년 만에 친정어 머니를 만난 딸과 사위가 간청하는 바람에 며칠 머물기로 한 것이 그만 보름을 넘기고 말았다. 그러자 보주는 심심 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혼자 길을 떠났다. 모처럼 누 나를 만난 어머니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한참을 길을 걷던 보주가 갈림길에서 길을 헤매다 어떤 노인을 만났다. “할아버지. 평창으로 가려면 어떤 쪽으로 가야 하나요?” 그러자 노인이 보주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알 려주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어린 아이가 참으로 용하구나. 혼자 그 먼 길을 떠나다니. 평창으로 가려면 이쪽으로 가야 한단다.”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한 보주였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였기에 창평을 그만 평창으로 잘못 말하고 말았다. 노인은 아이가 강원도 평창으로 간다는 줄 알고 반대쪽 길 을 알려주고 말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혼자 가다 보니 보주는 거리의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태백산에 이르러 어떤 스님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스님께 지나온 일들을 말씀드리자 자초지종을 들은 스님이 보주의 고향이 평창이 아니라 창평이라는 사실을 알려주 었다. 그때서야 보주는 모든 것이 하늘의 섭리임을 깨닫고 지금의 태백산 정암사 문희선사에게서 장주(藏珠)라는 법 명을 받고 스님이 되었다. 문희선사에게서 경전과 참선을 두루 익힌 장주스님은 스 승이 열반에 들자 삼년상을 치르고 참선 공부를 더욱 열심 히 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도중에 장주스님은 오진대사를 만났는데, 남해에 있는 수월원(水月院)의 대비대사를 찾아 선지식을 배우라 하였다. 남해로 가는 길에 장주스님은 어떤 노인을 만났다. “스님의 법명이 어찌 되시는지요.” “소승 장주라 하옵니다.” “그렇군요. 오늘부터 환주(還珠)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처음 보는 노인이 다짜고짜 환주라고 이름을 바꾸라 하자 장주스님은 당황하였다. 하지만 예사 노인이 아님을 깨달 은 장주스님이 그 자리에서 약속하였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제 법명을 환주라 하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느닷없이 관세음보살로 변하였다. 관세음 보살을 보고 무릎을 꿇은 환주스님의 뇌리에 관세음보살의 목소리가 음악소리처럼 울려퍼졌다. 보주, 아니 환주스님은 관세음보살로 인해 자신의 과거를 환하게 깨닫게 된다. 전생에 환주는 관음상을 업고 옥과에 봉안한 성덕 처녀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깨닫게 된 환주스님이 창평에 있는 집으로 돌아 가 속가의 부모를 만났다. 20년 가까이 집 나간 아들을 애 타게 기다리던 부모는 스님이 되어 돌아온 보주를 보고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런 부모님을 차마 다시 떠나기 힘들었던 환주스님은 가까운 관음사의 주지가 되어 때로 속가의 부모를 찾아뵈었다. 몇 년 후 속가의 부모님이 거의 동시에 돌아가셨다. 비록 출가한 몸이지만 자신으로 인하여 대가 끊기게 됨을 안타 깝게 여긴 환주스님은 부모님의 위패를 관음사에 모셨다. 그리고는 해마다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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