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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

eorks 2019. 11. 20. 00:36
野談 ♡ 野史 ♡ 說話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 여수설화 / 설화』 앵무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 봉두 (鳳頭)마을은 위씨 집성촌이다. 이곳에는 위효징의 집터가 있는데, ‘봉황포란지혈(鳳凰抱卵之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 의 명당)’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일이다. 이순신 장군 막하에서 활동하였던 위 대경(魏大經 1555~1597)은 충렬공(忠烈公) 위계정 (魏繼廷 ?∼1107)의 후손이다. 위계정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 등을 거 쳐 1104년에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예종 즉위 후에 는 문하시중을 지낸 장흥 위씨 최초의 재상이다. 위대경은 장흥에서 태어나 21세 때인 1575년(선조 8) 과 거에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전주 최씨와 혼인하여 아들 효징(孝徵)을 낳았다. 대경은 이후 다양한 관직을 두 루 섭렵하였다. 대경이 원주판관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 대경의 나이 38세 되던 해이다. 그 해 4월, 상주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군사를 이끌고 달려 가 병사(兵使) 황진(黃進)과 함께 많은 적을 참획하였다. 상주전투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전라좌수영으로 내려가 이순신을 도와라는 어명을 받고 가족을 데리고 내려왔다. 여수로 내려가는 길에 대경은 먼 친척이 산다는 율촌면 산 수리에 들러 아내와 아들을 의탁케 하였다. 이순신 장군 진영으로 들어간 대경은 옥포해전과 당항포해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우여곡절 끝에 왜군들이 물러갔지만 대경 에게는 휴식이란 없었다. 전란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 하고 군대도 재정비하는 등의 일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 다. 그러다 보니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는 것도 차일피일 미뤄 졌다. 여수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대경은 좌수영이 있는 여수에 집을 얻어 가족과 함께 지냈다. 그렇게 여수 에 머문 지도 벌써 5년이 되었다. 그런데 왜군들이 다시 쳐들어왔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난 것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대경은 어김없이 전투 준비에 나섰 다. 그런데 2월, 이순신 장군이 무고로 투옥되고 만다. 그해 7월 대경은 칠천량해전에 나섰다. 칠천량해전에 나 가기 전 대경은 무슨 생각인지 아들 효징을 불렀다. “효징아. 이제 네 나이도 열다섯이니 적지 않은 나이다. 만일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 고향이 장흥 행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 효징은 아버지께서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하신다는 것 을 알고, 그런 아버지께 힘이 되어드리기 위해 그 역시 단 단한 각오를 하였다. “물론이에요 아버지. 그 동안 하셨던 것처럼 용감하게 싸 우셔서 왜놈들을 물리치세요. 어머니는 걱정마시구요.” 그러나 이순신 대신 원균이 지휘하던 수군은 칠전량에서 대패를 하고 만다. 그 과정에서 원균이 사망하게 되는데 아깝게도 대경 역시 목숨을 잃고 만다. 조정에서는 대경을 상주영장(尙州營將)으로 특제(特除 임 금이 특별히 벼슬을 내리는 것)하였다. 영장은 임진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 창설된 속오군(束伍軍)의 최상부 단위인 영의 책임자를 말한다. 대개는 고을의 수령이 겸임 하였다. 칠천량에서 우리 수군이 대패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전령이 와서 대경의 전사 소식을 전하였다. 관사에 있다가 그 소식을 들은 부인 최씨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고 속으로 흐느껴 울었다. 어린 아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은 막을 수 있 어도 표정마저 감출 수는 없는 법. 아버지께 변고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효징이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어머니, 슬퍼마세요. 비록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치신 목숨이시니 슬퍼할 일만은 아 닌 것 같아요.” 어린 효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 도로 침착하고 또릿또릿한 말씨였다. 그래서 최씨는 남편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유품 몇 가지를 챙겨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효징을 데리고 장흥으로 돌아가던 최씨는 몇 년 전 잠시 머물었던 산수리 친척집에 인사는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산수리로 향하 였다. 산수리에는 중종 때 사화를 피해 17세손 위종로(魏宗魯)의 아들 위용(魏庸)이 먼저 입향하였는데, 그 인연으로 대경이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여수에 내려오면서 산수리에 들러 잠시 의탁을 하였던 것이다. 대경의 고조할아버지인 종(宗) 자 복(復)자 할아버지가 위종로 할아버지의 친형이었다. 장흥 위씨 17세손 위종복에게는 유형(由亨)과 유정(由貞)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유형의 자손들이 장흥 관산에 주로 살아서 관산파라 하고, 유정의 자손들은 장흥 행원에 주로 살아 행원파라 한다. 유정의 장남 원충(元忠)의 셋째 아들이 억장(億章)인데 억장의 아들이 대경이었다. 최씨가 아들 효징을 데리고 산수리로 가는 길에 앵무산 봉우리 밑 봉두마을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던 봉황이 놀라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최씨는 봉황을 보게 된 것이 길조라 여기고 길을 재촉하였다. 그러자 효징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어머니를 잡아끌었다. 대경이 임진왜란 발발 직전 원주판관으로 있을 때의 일이 다. 하루는 효징이가 아버지께 질문을 하였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 다녀요?” 너무나 갑작스런 질문에 대경은 말문이 막혔다. 어린 아들 을 데리고 강원도며 함경도며 안 가본 곳이 없었기 때문이 다. 말문이 막혔는지 대경은 딴소리를 하였다. “우리 장흥 위가 시조는 위경(魏鏡) 할아버지란다. 신라 때 (638년, 선덕여왕 7년) 당나라에서 보낸 8학사 가운데 한분이신데, 신라로 귀화하시어 정착하셨단다. 신라 말 창 (菖)자 주(珠)자 할아버지가 중시조이시다. 고려 때 재상을 지낸 5세조 계(繼)자 정(廷)자 할아버지, 송광사 6세인 원 감국사 원(元)자 개(凱)자 할아버지 등 우리 조상들도 훌 륭한 분들이 많단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관직이 낮지만 언젠가 더 훌륭한 후손들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 그러려면 효징이 너도 공부 열심히 해야겠지?” 동문서답을 하는 아버지가 이상하였지만 그래도 효징은 집안 내력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뿌듯하였다. 부자지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다가오더니 효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 니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아이의 상을 보니 명당을 잡을 상이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어떻다는 말씀인가요?” 말을 꺼내다 마는 스님에게 궁금해 죽겠다는 듯 대경이 재촉하였다. 그러자 스님이 못 이기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명당을 잡을 상이기는 하지만 큰 슬픔을 겪어야만 명당이 나타날 것이오.” 그리고는 스님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멀리 사라져버 렸다. 스님의 명당 이야기가 떠오른 효징이가 어머니께 그 사실 을 말씀드리자 효징의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으로 얻게 된 명당이라 여기고 그 자리에 집을 지어 살기로 결심하였다. 장흥으로 돌아가고도 싶었지만 효징이나 그 후손들이 복 을 받을 명당이라 하니 여기에 집을 짓고 살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봉두마을에 집을 짓고 살게 된 효징의 나이도 어느 덧 스 물이 넘었다. 그런데 마을에는 효징 또래인 김씨 성을 가 진 처녀가 살았다. 임진왜란 10년 전인 1582년 경 광산 김 씨 김명운(金命韻)이 충청도 연산에서 이곳으로 입향하면 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 집 딸이었던 것이다. 효징은 그 아가씨와 구면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잠시 산수리에 살 때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데 멀리 서 해맑은 모습의 소녀가 나타나 소년의 가슴을 쿵쾅거리 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비록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게 되었지만 훌륭한 가문이라 알려져 있었기에 김명운 역시 효징을 탐내었다. 이순신 장군이 홍면비장(紅面飛將)이라 칭찬한 위대기(魏大器) 장군은 대경의 6촌 형제인데,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조전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충청수사까지 지냈다. 더구나 지난 몇 년 동안 지켜보았지만 효징의 효심이나 반 듯한 자세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익히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던 터라 차자 혼담이 오고 갔고, 그렇게 해서 효 징은 김명운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장가를 간 다음날 장인이 사위를 불러 앉혀놓고 조심스럽 게 말을 꺼냈다. “내 자네를 정말 좋게 보았는데 이렇게 장인과 사위로 마 주앉게 되니 정말 기쁘기 한량 없네. 괜찮다면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와 함께 살면 어떻겠나. 아들이라 생각할 터이 니 그리 하게.” 나름 재력이 있었던 김명운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사 위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였건 것이다. 그러나 효징은 장인 어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장인어른의 말씀은 너무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머 니를 모시고 사는 집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효징은 장인어른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별 볼 일 없는 땅인 줄 알았던 곳이 봉황포란지혈(鳳凰抱卵 之穴)이라 하니 장인어른 역시 깜짝 놀랐다. 그래서 김명 운은 딸과 사위를 위해 그곳에 좋게 집을 지어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그때 지은 집이 400년 가까이 있었는데, 1982년 15세 종손 인 위상복 씨가 그 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 때 사당도 다시 정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집 후원 한복판에 반경 1m 정도의 땅 안 에는 아무리 눈이 많이 와도 쌓이지 않고 오자마자 녹아 버린다고 한다. 그것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어 따뜻한 기 운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한다. 봉황은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 한다. 봉황새가 번식을 할 때 반드시 암수를 구별하는데, 봉은 일정치 않 지만 황은 1회에 한 마리밖에 낳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위효징의 자손이 현재 18세손(위상복 씨 증손자)까지 내려왔어도 모두가 딸은 한 사람씩밖에 낳지 못했다고 한 다. 위상복 씨에 따르면 딸을 여럿 낳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잘못되고 하나만 살아남았다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 이 내용은 여수문화원장을 지낸 故 문정인 선생님이 채록한 내용에서 기본 뼈대를 삼았음을 밝힙니다..)


......^^백두대간^^........白頭大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