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차길진의 산따라 강따라-모악산

eorks 2023. 3. 31. 13:59

풍수지리(風水地理)

차길진의 산따라 강따라-모악산
인간미륵을 길러낸 땅
백성들은 민심이 흉흉할수록 현실보다 미래에 기대하는 미륵신앙에서 위안을 받고 대안을 찾으려 했다. 민중들의 염원이 모인 모악산은 모든 사회 변혁운동 이념의 산실이었다. 미륵신앙은 이상사회의 통치이념으로 또는 민족종교로 변신하며 시대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견훤은 스스로 환생한 미륵임을 자처하며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된다.
견훤은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를 자신의 복을 비는 사찰로 삼고 중수하여 백제의 계승자임을 선포한다. 견훤은 중국의 오(吳)·월(越)과 통교를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였고 신라의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는 등 막강한 백제 재건에 성공한다.

그러나 후백제는 너무 짧았다. 내부 분열로 부흥운동마저 실패했던 백제의 전철을 후백제도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지만 이를 시기한 다른 아들들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神劍)이 왕위에 오른다. 3개월 후,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고려로 망명, 태조와 협력하여 10만 대군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했고, 격전 끝에 후백제는 고려에 굴복, 93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상세계를 향한 꿈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1546년 모악산 부근 금평 저수지 위 구릿골에서 태어난 정여립(鄭汝立)은 영국의 정치가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서 공화정(共和政)을 주장한 걸출한 선각자였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던 정여립은 24살에 과거 급제하여 십수 년간 순탄하게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유학의 계급관료적인 폐단을 꿰뚫은 정여립은 왕권 체제 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는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혈통세습이 아닌 능력세습'이라며 왕권의 세습을 반대하였고,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그리고 신분철폐를 주장한다.

너무 시대를 앞선 탓일까. 정여립은 선조왕의 미움을 사 관직을 떠나게 된다. 낙향한 정여립은 구릿골 일대 제비봉을 중심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매월 보름날에 활을 쏘고 무예를 익히며 잔치를 베풀었다. 대동계원은 양반, 상놈, 승려 등 신분귀천이 없었다. 대동 계원 스스로 향토를 방어할 수 있는 군사훈련도 병행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향토방위대쯤 된다. 왕조 속에서도 모악산에 작은 공화국을 건설한 셈이었다.

정여립은 백제나 후백제가 세습 신분 계급을 근간으로 하는 왕조라는 한계 때문에 미륵 세상을 건설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신분이 아니라 개인 능력에 따라 등용하며, 민중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공화국이 정여립이 꿈꾸는 미륵 세상이었다.

1587년(선조 20) 왜군이 손죽도로 쳐들어오자, 정여립은 전주 부윤 남언경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여 대동계를 즉각 출동해 왜군을 물리친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군대의 출동은 조정에 보고되고, 대동계를 중심으로 역성혁명을 준비한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백성들 사이에선 벌써 '이가(李家)는 망하고 정가(鄭家)는 흥한다'는 정감록이 횡행했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안악군수, 재령군수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고 만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士禍)를 합한 희생자보다 더 많은, 선비만 1000여 명이 처형당하는 피의 지옥이 연출되니,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등용에 제한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정여립의 거대한 미륵 세상 구현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무고한 원혼들의 저주였을까. 공교롭게도 3년 뒤인 1592년 조선은 비류의 백제가 세운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온 나라가 불타게 된다. 임진왜란 때 호남평야를 지킨 것은 관군(官軍)이 아니라 의병(義兵)들이었다. 의병은 정여립이 대동계에서 조직한 향토방위대가 전신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근래 역사가들 중에는 정여립이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에 자극받아 임진왜란을 미리 준비했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역모로 조작했다고 재평가하기도 한다.

금산사에서 서편으로 한 시간 가량 걸으면,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전주로 넘어가는 모악산 자락에 창건했다는 귀신사(歸信寺)가 나온다. 1992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소설인 '숨은 꽃'의 무대가 바로 귀신사다. '그는 귀신사에 있었다. 나는 그를 귀신사에서 만났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귀신사를 이렇게 소개한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 뒤뜰에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돌사자상이 이채롭다.

모악산 동쪽 구이면 원기리에서 선녀폭포 쪽으로 가다보면 전주 김씨 시조묘 입구에 전주김씨 종가에서 세운 공덕비와 정자가 있다. 군사정권시절 이 묘는 공공연한 국가기밀로 접근이 금지되었다. 이곳을 찾으러온 풍수지리가들은 덩치 큰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김일성(金日成)의 32대 조상 김태서의 묘가 위치했기 때문이다. 일명 '김일성 조상묘'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접근 금지였다.

◇ 모악산에 자리한 '김일성 조상묘'
육관 손석우씨가 지은 '터'라는 풍수지리책에는 '이 묘의 지기가 발복하여 그 후손이 장기집권을 하게 되며, 그 운이 49년 만인 1994년 9월에 끝난다'라는 내용이 예언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내용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예언한 날짜와 근소한 차이로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1994년 7월)부터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모악산의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모악산을 동쪽에서 오르다보면 고려 밀교(密敎)의 본산지인 대원사(大願寺)가 나온다. 밀교의 특징은 불보살의 초월적인 가피력을 강조하는데, 병이 낫는다든지, 외적 침입을 격퇴한다든지 인간사의 각종 애환들을 치유한다. 강증산이 수도하여 도통했다는 대원사는 진묵대사(震默大師)의 자취가 여전하다. 진묵대사는 숱한 이적과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보였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으로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한국 불교사상 가장 신비로운 스님이다.

진묵대사는 전주의 장날에 가서 동중정(動中靜)을 시험했는데, '오늘은 장을 잘 보았다'하면 북새통인 장터에서도 내면의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이고, '오늘은 장을 잘 못 보았다'하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곡차(穀茶)란 말도 진묵대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던 진묵대사였지만, 같은 잔이라도 '술'이라하면 외면하다가 '곡차'라고하면 벌컥 들이켰다. 대원사에서 정상 쪽으로 도보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수왕사에는 지금도 송홧가루를 재료로 하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가 빚어지고 있고, 진묵대사가 술을 빚었던 도구들이 전해진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 진묵을 보러 찾아왔는데, 그만 해가 질 때가 되어 밤길이 걱정되었다. 진묵대사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지 않고 산문(山門)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분명히 서산으로 져야 할 해가 집에 당도하도록 수 시간동안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대문을 열자 해가 뚝 떨어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진묵대사는 출가한 승려로서 대를 이을 손이 끊기어 그의 어머니 묘에 성묘할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어머니 무덤에 고사를 드리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는 말을 퍼뜨렸다. 효험이 입소문을 타자 오늘날에도 많은 참배객이 줄을 이어 이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40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잘 보존 되어 내려오고 있다.

후세들은 이 무덤 자리를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香火之地)' 즉 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1000년 동안 이어지는 명당이라 부른다.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