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고전에서 전해오는 조선왕조 500년 유머/김현룡지음]
|
[제2ㅡ9화]좋은 기회를 놓친 김예종(金禮宗)
성산월(星山月)은 성주(星州) 기생이었는데, 서울로 선입되어
올라와 장안에서 명성을 독차지하는 유명한 기생이 되었다. 그
래서 내노라하는 호걸남아(豪傑男兒)들이 만나려고 애를 써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이름 있는 기생이었다.
하루는 조정의 유명한 인사들과 한강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해가 지고 어두운데도 끝나지 않아 성산월은 혼자 살짝 빠
져나와 술에 취한 채 남대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
두운 밤길에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까지 만났다.
성산월은 어쩔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혜매면서 고생하다 간
신히 남대문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남대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옷은 젖고 지친 몸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마침 연당(蓮塘)
못 서쪽에 있는 작은 창문에서 불빛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성산월은 급히 달려가서 그 창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안에 사람이 있으면 문을 좀 열어 주십시요. 나는 기생 성산
월입니다. 밤이 늦었고 비를 만나 도움을 청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다급하게 말하면서 쉬어 갈 것을 요청했다.
얼마 후 문이 열리는데, 한 초라한 선비가 글을 읽고 있다가
내다보고는 급히 문을 도로 닫으며 소리쳤다.
"비가 오니 어디에서 요귀(妖鬼)가 나를 홀리려고 왔구나. 어
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선비는 비에 젖은 요염한 얼굴의 기생 성산월을 보고는 사람
이 아니라 요귀가 둔갑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문을 굳게 닫
고 연신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빨리 가라고 소리쳤다.
이에 성산월이 아무리 요귀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며 사정
을 해도 선비는 끝내 문을 열어 주지 않고 거절했다. 성산월은
문밖 추녀 밑에서 고생하며 밤을 지세고, 아침에 날이 밝은 뒤에
야 문을 열고 나오는 선비를 보고 말했다.
"이 불쌍한 시골 선비야. 내가 정말 요귀인지 자세히 보아라,
장안의 유명한 기생인 이 성산월이, 보통 때 같으면 청천명월(靑
天明月)을 가지고 나를 만나려 해도 너 같은 샌님을 내가 만나
주겠느냐? 내 갑자기 비를 만나 너에게 애걸했는데, 그 둘도 없
는 기회를 놓친단 말이냐?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상관(堂上官)
으로 출세시켜 줄 수도 있었는데, 이 복 없는 사내야!"
이렇게 꾸짖고 떠나가니, 선비는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서서
성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끄러워했다.
이 선비는 문과에 급제한 첨정(僉正) 김예종이었는데, 사람들
이 뒤에 이 이야기를 듣고는 절호의 출세 기회를 놓쳤다고 하면
서 크게 웃었다.<조선 중기>
|
......^^백두대간^^........白頭大幹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