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천(白樂天)과 원미지(元微之)는 당(唐)의 정원(貞元) 16년에 급제하 여 벼슬길에 올라 좌습유(左拾遺)가 되었다. 함께 과거를 보았으며 함께 벼슬길에 나가 교서랑(校書郞) 에 올랐다. 백낙천은 훗날 강주(江州)의 사마(司馬)로 좌천 되었으며 다시 소환되어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런데 백 낙천은 시의 혁신에도 공헌을 했다. 한나라 때의 민요를 토대로 시대가 던지는 폐단과, 그로 인한 백성들의 분 노와 고통을 담은 신악부(新樂府)라는 악부를 지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 어 또다시 좌천되었다. 백낙천은 원미지와 창화(唱和)하여 사람들은 그를 원백체 (元白體)라 칭 하였다. 그러나 멀리 떨어지게 되자 그를 그 리워하는 편지를 썼다. "아, 미지여 미지여. 그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도 3년이 지났네. 자네의 편지도 못 받은지도 2년이 되었네. 인생이란 결코 길지 않는 것. 그런데도 자네와 이렇게 떨어져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뿐일세. 아교와 옻칠같은 마 음(膠漆之心)으 로서 북쪽 오랑캐 땅에 몸을 두고 있네. 그리워하면서도 이 렇게 떨어져 있으니 아, 미지여 미지여 어찌 하리오. 이것을 어찌 하리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