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前漢:B.C. 202∼A.D. 8) 말, 왕실의 외척인 대사마(大司馬) 왕망(王 莽)은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신(新:8∼ 24)이라 일컬었다. 왕망은 농지, 노예, 경제 제도 등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책을 폈으나 결과 는 반대였다. 복잡한 제도에 걸려 농지를 잃고 노예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났 다. 또한 화폐가 8년 동안에 네 차례나 바뀌는 등 경제정책 역시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 워졌다. 그래서, 왕망은 백성들은 물론 귀족들로부터도 심한 반감을 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북 변경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 를 계기 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湖北省當陽縣) 내의 녹림산에 근거 지를 둔 8000여의 한 무리는 스스로를 '녹림지병(綠林之兵)'이라 일컫고 지주의 창고와 관고(官庫)를 닥치는 대로 털었다. 그 후 이 녹 림지병은 5만을 헤아리는 대세력으로 부상했는데 후한(後 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25∼57) 유수(劉秀)는 그들을 십분 이용하여 왕망의 신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