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세 치의 혀[舌] 하나로 제후를 찾아 유세하는 세객(說客)들은 거의 모두 책사(策士) 모사(謀士)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종횡 으 로 합쳐서 경륜하려던 책사 모사를 종횡가(縱橫家)라고 일컬었다. 위(魏)나라의 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범저(范雎)도 종횡가를 지향 하는 사람이었으나 이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잡 힐 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중대부(中大夫) 수 가(須賈) 의 종자(從者)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수가보 다 범저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는 제나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참언(讒言)했다. 범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 는 모사답게 옥졸을 설득, 탈옥한 뒤 후원자인 정안평(鄭安 平)의 집에 은 거하며 이름을 장록(張祿)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 신 왕계(王稽)를 찾아가 장록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을 진나라에 데 려온 왕계는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전하, 위나라의 장록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 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 '알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累卵 之危]'며 선생을 기 용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 다."
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 시대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 후 범저(장록)는 '원교근공책 (遠交近攻策)'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