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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 /남아프리카공화국 /형사법원 사건번호 제253호/1963년(넬슨 만델라 등에 대한 공소문)(148)

eorks 2019. 10. 28. 13:17

세계기록유산 /남아프리카공화국 /형사법원 사건번호 제253호/1963년(넬슨 만델라 등에 대한 공소문)
[Criminal Court Case No. 253/1963(State Versus N Mandela and Others)]
    리보니아 재판(The Rivonia Trial)은 1960년 국가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범아프리카주의자회의(PAC)를 불법으로 규정한 법령에 의거하여 공권력을 발동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로써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남아프리카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가장 규모가 컸던 반(反)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정책) 단체의 고위 인사를 체포하고 기소하였다. 한편 리보니아 재판은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에게 피고석에서 ANC의 목적 및 목표를 광범위한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 재판의 결과로,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로벤 섬(Robben Island)과 기타 여러 곳에서 1990년에 석방되기 전까지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Arrest warrant for Nelson Mandela leading to this imprisonment.


국가 : 남아프리카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
소장 및 관리기관 :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립 문서·기록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Service of South Africa)
등재연도 : 2007년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

1910년 5월 31일 남아프리카연방이 성립되기 전에도 흑인들이 자국에서 그들의 권리를 인정받으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남아프리카연방은 아프리칸스어(Afrikaans, 네덜란드어에서 발달한 언어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용됨)와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들 사이에서 이룬 타협의 결과로 탄생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흑인들은 배제됐다. 그 결과 1912년 1월 8일 수백 명의 흑인들이 블룸폰테인(Bloemfontein)에 모여 ‘남아프리카원주민회의’를 결성했는데, 이것은 1923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로 개명되었다.

초기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전개한 저항 방식은 비폭력적이었으며, 시민 불복종 운동과 파업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후 1928년 ‘남아프리카공산당(CPSA)’이 ANC와 연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함께 또는 별도로 대중운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여기에는 1940년과 1945년의 알렉산드라(Alexandra) 버스거부운동과 1940년대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불법거주자운동이 포함된다. 1944년 4월에 ANC의 청년연맹(ANCYL)이 결성되었다. ANCYL에서 넬슨 만델라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 1912~2003)는 지도자가 되고, 넬슨 만델라는 1950년에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남아프리카 정부는 흑인들이 가지고 있던 미미한 자유마저도 빼앗는 법령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흑인들을 토지에서 쫓아내는 1913년과 1936년의 토지법도 포함된다. 그리고 1936년에는 선거인 명부에서 흑인들을 삭제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1948년에는 국민당이 집권함에 따라 인종문제에 대해서 더욱 보수적인(압제적인) 정책이 뒤따랐다. 1949년 ANC의 연례(年例) 총회에서는 행동강령이 채택되었다. 이것은 ANC의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원칙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 원칙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 독립, 모든 형태의 차별 배제, 거부운동 및 파업활동, 흑인의 경제력 확대 등을 요구했다. 1950년 남아프리카 정부는 공산주의 금지법을 제정해 CPSA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1951년 블룸폰테인에서 개최된 연례 회합에서 ANC는 훗날 ‘불복종운동’으로 알려지는 계획을 채택했다. 이 운동은 1952년 4월 6일 공식 채택되고, 6월 26일 개시되었다. 이 운동의 주목표는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감옥이 가득 차도록 법률을 교묘하게 위반함으로써 국민당의 계속적인 국정 운영을 불가능하게 하는 데 있었다. 이 활동이 전개되자, 법률에 저항하거나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을 중벌에 처하는 조항이 추가된 1953년의 공공안전법과 형법개정안이 만들어졌다. 넬슨 만델라는 정부가 ANC의 조직을 파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ANC를 구역이나 세포 등의 더욱 작은 단위로 나누는 ‘M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1953년 정부는 흑인들에게 열등한 교육을 받게 하는 ‘반투 교육법(Bantu Education Act)’을 시행했다. 이 법은 1955년 4월 1일에 발효되었다. 이에 대한 저항은 거부운동으로 발전해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가까스로 수습되었다. 1955년에는 또 정부가 소피아타운(Sophiatown)에 거주하는 흑인들을 훗날 ‘소웨토(Soweto, 남서부마을들(South Western Townships)의 머리글자를 따 붙여진 지명)’로 불리는 곳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ANC는 비폭력·비협력으로 맞섰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소피아타운은 1960년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에 파괴되었다.

1955년 ANC의 총회가 요하네스버그 인근 클립타운(Kliptown)에서 열렸다. 2일 동안 개최된 이 회의에서는 자유헌장이 채택되었다. 헌장의 전문에는 “남아프리카는 흑백을 불문하고 거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는 구절이 있다. 이 헌장은 ANC 정책의 주춧돌이자 민주화가 이루어진 남아프리카 헌법의 기본원칙이 되었다.

1956년 8월에는 2만 명의 여성들이 그해 1월부터 흑인 여성들에게 통행증 지참을 요구하는 것에 반대하며 프리토리아(Pretoria,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 수도)에 있는 정부청사를 향해 행진했다. 하지만 정부는 그들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정부는 이 저항운동을, 특히 자유헌장의 채택을 반역 행위로 보았다. 그래서 1956년 여러 단체들의 회원 및 지지자 156명이 체포되고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 가운데는 아델라이데 탐보(Adelaide Tambo, 1929~2007), 넬슨 만델라, 월터 시술루, 조지 나이커(George Naicker, 1919~), 앨버트 루툴리(Albert Luthuli, 1898~1967), 아메드 카트라다(Ahmed Kathrada, 1929), 모세스 코타네(Moses Kotane, 1905~1978), 조 슬로보(Joe Slovo, 1926~1995) 등이 포함된다. ‘반역 재판’이라 알려진 이 재판은 1961년까지 계속되었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958년 아프리카주의자들이 ANC와 결별한 뒤, 범아프리카주의당(PAC)이 탄생했다. 로버트 소부퀘(Robert Sobukwe, 1924~1978)가 PAC의 최초의 대표였다. 1959년 PAC는 통행증 관련 법률에 대한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1960년 3월 21일 샤프빌(Sharpville) 경찰서 밖에 군중이 모였다. 이때 경찰이 발포하는 바람에 69명의 흑인이 죽고, 18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회 불안이 전국적으로 확대됐고, 정부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1960년 4월 8일 ANC와 PAC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61년 ANC와 PAC 산하의 무장단체로서 각각 움콘토 웨 시즈웨(Umkhonto We Sizwe, ‘국민의 창(槍)’이라는 뜻)와 포코(Poqo)가 발족했다. 넬슨 만델라가 움콘토의 지도자로 선출됐다. 움콘토의 지휘부는 요하네스버그 인근 리보니아의 릴리스리프(Lilliesleaf) 농장에 자리를 잡았다. 1961년 국민당 정부에 대한 태업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62년 8월 5일, 넬슨 만델라는 오랜 해외 활동 후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었다.

움콘토 웨 시즈웨의 지도자들은 1963년 7월 11일 리보니아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지도자들은 넬슨 만델라(1962년에 체포)를 비롯해 월터 시술루, 아메드 카트라다, 고반 음베키(Govan Mbeki, 1910~2001), 데니스 골드버그(Dennis Goldberg, 1933~), 레이먼드 음흘라바(Raymond Mhlaba, 1920~2005), 라이오넬 번스타인(Lionel Bernstein, 1920~2002), 제임스 캔터(James Kantor, 1927~1975), 엘리아스 못소알레디(Elias Motsoaledi, 1924~1994), 앤드루 믈랑게니(Andrew Mlangeni, 1925~) 등이었다.

1963년 10월에 시작된 재판은 1964년 6월에 끝이 났다. 이 재판은 리보니아 재판으로 알려져 있다. 기소된 11명 가운데 1명은 증거 없음으로 석방되고, 8명은 종신형 판결을 받았으며, 나머지 2명은 나중에 석방되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계기로 남아프리카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세계의 관심이 다시 한 번 집중되었다. 전 세계가 이 체제의 사악함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국제연합은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를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선언했다. 자유운동의 지도자들은 국경을 넘어 남아프리카 밖에서까지 가까스로 투쟁을 이어나갔다. 자유운동과 다른 나라 정부의 꾸준한 압력에 의해 1990년 자유운동은 해금(解禁)되었고, 마침내 1994년 4월 27일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형사법원 사건번호 제253호/1963년(넬슨 만델라 등에 대한 공소문) [Criminal Court Case No. 253/1963(State Versus N Mandela and Others)]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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