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베네수엘라 /콜롬베이아 :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총통의 기록물
[Colombeia : Generalissimo Francisco de Miranda’s Archives]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총통의 기록물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총통의 기록물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총통의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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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총통의 기록물
국가 : 베네수엘라(Venezuela)
소장 및 관리기관 : 베네수엘라 국립역사원(National Academy of History)
등재연도 : 2007년
본문 :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 1750~1816)의 생애는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1790년부터 꾸준히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추진하였다. 대영제국(British Empire)에 자신의 계획을 제시하였고, 과업 착수에 협조를 얻기 위해 혁명기의 프랑스를 방문하였으며, 미국 민주주의를 갓 탄생시킨 정치가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널리 알렸다. 이와 동시에 헌법을 기초하고 침공 계획을 수립하는가 하면, 성명서를 작성하고 회합을 주선하며 자금을 모았다. 이 모든 일이 라틴아메리카 영토의 독립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등재된 문헌은 전 세계를 초월해 변화가 일어난 시대를 다루는 방대한 양의 다양하고 매우 흥미로운 정보이다. 이 일련의 기록물은 인류에 커다란 역사적 의미가 있는 각기 다른 사건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엽의 여러 해의 기록이다. 사건이란 말하자면, 알라위트 조(Alauita, Alawites) 술탄국 모로코(Morocco)의 무어 인(Moors)과 에스파냐 사이의 전쟁, 미국의 독립 과정과 그 독립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기여한 프랑스-에스파냐의 참전, 예카테리나 대제(Empress Catherine the Great, 1729~1796) 시대 제정 러시아의 정계, 프랑스 혁명과 그로부터 비롯된 국제 분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히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초기 독립투쟁 등이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건에 적극 가담하였다.
- 1772년 마드리드(Madrid)의 왕녀 보병 연대 대위.
- 1774년~1775년 술탄국 모로코에 대항하여 멜리야(Melilla)를 방어하는 에스파냐군 연대 대위.
- 1781년 아라곤(Aragon) 연대 대위이자, 미국 독립 전쟁 동안 펜사콜라(Pensacola)의 점령을 강화하기 위해 후안 마누엘 카히갈(Juan Manuel Cajigal) 장군의 부관으로 복무. 펜사콜라를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데 눈부신 활약을 함으로써 동년 5월 에스파냐군 중령으로 승진. 1782년에는 영국령 바하마 제도(Bahamas)를 차지하려는 에스파냐의 해군 원정대에 참가.
- 1787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와 친분을 쌓음. 여제가 그에게 권한을 주어 러시아 군복을 입음으로써 에스파냐 첩자라는 끈질긴 혐의에서 벗어남.
- 1792년 군사 작전을 성공시켜 프랑스 혁명군 원수로 임명됨.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이라는 이상을 더욱 고취시키겠다는 책임감에서 직위 수락. 그 직후 발미의 싸움(battle of Valmy, 1792)에서 보인 영웅적 행동을 인정받아 프랑스 공화국 육군 사령관이라는 직위까지 승진. 발미에 기념물(동상)을 세우고,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를 추모하는 영예를 안김.
- 같은 1792년 프로이센(Prussian)·오스트리아 연합군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프랑스의 샤를 뒤무리에(Charles Dumouriez, 1739~1823) 장군 다음으로 서열 2위에 해당하는 북방 집단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됨.
- 1811년 베네수엘라 연합(Venezuelan Confederation)의 육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에스파냐의 통치에 항거하는 최초의 독립 전쟁 지휘.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당대에 손꼽히는 연대기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후대와 문서 기록의 역사적 타당성에 대한 감각이 매우 날카로웠던 그는 뜻 깊은 세계적 변화 중의 하나라고 인식한 시대의 발자취를 보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혁명 이전의 구체제(Ancien Régime)가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하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영향 아래 태어나 자란 그는 바로크 시대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및 그리스가 독립을 추구하는 동안 풍미하던 사조인 낭만주의의 탄생을 치열하게 경험하였다. 에스파냐와 모로코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리고 미국 독립 전쟁 도중에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펜사콜라를 점령하였을 당시 에스파냐군 장교였다. 샤를 뒤무리에 장군 휘하에서는 프랑스 북방 집단군 최고 사령관이라는 요직을 맡았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에스파냐 국왕의 통치로부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세계적 관심을 이끌어 내려고 기울인 노력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광범위한 관련 문헌과 기록을 보존하였다. 노력이란 바로 공화정 프랑스에 바친 값진 기여, 유럽의 수많은 나라에서 쌓은 경험과 전략적 인간관계,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독립을 발의하여 국제적 인식과 호의적 견해를 이끌어내는 기초 작업을 하려고 떠난 그 후의 미국 여행 등을 말한다.
그는 사적·공적 편지, 완벽한 재판 기록, 노트, 심지어는 혁명과 군사적 성격을 띤 악보들까지 정리하여 간직하였다. 이들 문서는 오늘날 중요한 여러 세계적 흐름, 그중에서도 특히 지난 여러 세기를 통틀어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친 흐름 중의 하나인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되는 1차 자료이다. 이 역사에 길이 남은 혁명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그는 아메리카 대륙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파리 개선문(Are de Triomphe)에 이름이 새겨지는 영예를 누렸다.
끊임없이 여행하는 중에도 상세히 기록하고 엄청난 양의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그의 기록물 보관소는 계몽주의 시대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서관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유럽 전역, 소아시아, 그리고 미국의 대서양 연안을 여행하였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주제에 대한 개인의 날카로운 성찰이 방대하게 쌓였고, 당대 주요 인사들과 주고받은 개인 서신과 문헌들이 흥미롭게 엮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 중의 하나로 그는 카리스마가 있어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라틴어와 고대 희랍어를 유창하게 읽고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인문학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이 사실은 당대 여러 인사들이 쓴 편지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미국의 몇몇 인사들은 그를 가리켜 철학자요 현인이라고 했으며, 그와의 우정은 소중히 간직해야 할 보물과도 같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방대한 장서로 미루어 그가 충실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국가 재산이 되어 있는 런던의 주택 ― 그래프턴웨이 27번지(27 Grafton Way) ―에 있던 장서는 19세기 첫 사반세기 때 그의 미망인이 처분하여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란다는 영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 등 여러 나라 언어와 그중에서도 특히 에스파냐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그는 편지와 여행 일지에 여러 국가와 그들의 문화, 국민성과 그가 만난 사람들, 지리(산악·수로·풍경, 그리고 가축) 등을 묘사해 놓았다. 역사성에 대한 흥미롭고도 심오한 언급 또한 많았다. 모든 요소에 탐구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여간 놀랍지 않다. 예컨대 그는 루브르 궁에 있는 미술품(주로 회화와 조각)을 묘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을 다루는 멋진 서적을 엮는 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정도이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여러 문헌 중에는 혁명기에 간행된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the Marseillaise)」의 악보 원본도 있다.
요약하면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아프리카·유럽, 그리고 아메리카 등의 세 대륙에서 활약함으로써 베네수엘라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독립을 이끄는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최초의 세계적 크리오요(Criollo, 식민지 출신의 에스파냐 인)’라고 불렸다. 기록물을 구성하는 63권 안에 묶인 엄청난 양의 개인 서신을 보면 그가 전략으로 삼은 대륙의 이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물은 현재 베네수엘라 국립역사원(National Academy of History)에서 소장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총통의 기록물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가 해방되는 과정에서 전개된 사건을 다루는 가장 믿을 만한 문헌 자료 중의 하나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를 세계인이라고 주장할 때는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1783~1789)를 두루 여행하였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곳에서 그는 정치적 이상을 전파하고 강화하였다. 유일하게 훔볼트(Karl Wilhelm von Freiherr Humboldt, 1767~1835)와 견줄 만큼 열성을 다해 실증을 추구하는 여행가인 미란다는 직접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세계상(世界像)을 형성하였다. 이런 그의 글은 당대 아메리카와 유럽의 생활양식을 설명해 주는 수많은 사건을 상세히 묘사한 기록이다. 수준 높은 정치, 문화 행사, 그가 소속된 사회 계층의 예법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여러 사회 계층의 경제생활과 상업계(商業界)를 다룬 글도 여러 편 있다.
미란다의 기록물이 대중에게 공개되면 일상사 연구를 동시대 역사 기록학의 한 지류로 만들고 있는 모든 나라의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자료로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이 기록물은 인류에 선험적인 역사의 흐름 세 가지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귀중한 문헌 중의 하나이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의 유일한 목적은 기록물을 보관하여 후대의 연구에 자료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의 기록물을 연구함으로써 근대에 가장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 특히 프랑스 혁명과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해 벌인 투쟁의 기원을 둘러싼 오늘날의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다. 실제로 미란다의 기록물은 수많은 사회과학자, 베네수엘라 정부, 베네수엘라 국립역사원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중에게 제대로 공개되지 못한 1차 자료이다. 오늘날과 미래의 전 세계 연구자들이 프랑스 혁명, 미국과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독립을 위해 벌인 투쟁 등에 관한 연구를 새로이 조명하기 위해서는 이 기록물을 보존하고 공개할 필요가 있다.
페드로 마누엘 아르카야(Pedro Manuel Arcaya) 박사처럼 아메리카를 연구하는 몇몇 전문가들은 국경을 초월하는 이 문헌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미란다가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여 보존하는 데 기울인 정성은 손꼽히는 여러 여행 기록자와 과학자의 정성과 견줄 만하다. 매우 특별한 사실이지만, 미란다는 미국 독립, 프랑스 혁명, 아메리카에 있는 에스파냐 여러 식민지의 해방이라는, 세계사적으로 커다란 세 가지의 움직임을 목격하였다.
미란다 장군의 기록물에 포함된 일부 문헌도 세계사에 영향을 미쳤다. 기록물에는 1793년 샤를 뒤무리에 장군이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과 프랑스 국민공회(French national Convention) 앞으로 미란다를 고소했고, 마찬가지로 미란다도 그 프랑스군 장군을 상대로 반역을 주장했기 때문에 받게 된 재판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 기록은 뒤무리에가 혁명을 배반하였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프랑스 북방 집단군의 패전 원인을 분석하는 동안 지롱드 당(Girondist)이 자코뱅 당(Jacobin)을 상대로 표명한 입장을 강화해 주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덧붙여 말하자면, 미란다는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과정을 다루는 많은 양의 문헌·인쇄물,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계 이민들이 쓴 편지를 보존하였다. 이들 자료는 혁명 과정의 중요한 일부분과 사법 절차를 모두 밟는 동안 긴장된 정치적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한편 미란다는 프랑스인과 외국인 관찰자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그러한 사건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들 기록물, 특히 ‘파리 회의록(Minutes of Paris)’에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해방을 향한 초기 이상이 기록되어 있다. 파리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해 영국과 미국의 협조를 요청하려고 최초의 전략을 수립하던 곳이다. 미란다는 해방이라는 대의를 품고 지지를 얻어 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일련의 행동에 돌입하였다. 그는 에스파냐 국왕의 통치로부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를 해방시키려는 이상과 계획에 관해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이 기록물은 국제 외교 관점에서 볼 때 에스파냐의 여러 식민지가 독립할 가능성을 두고 당시 여러 주요 국가에서 견지한 입장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콜롬베이아 :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총통의 기록물 [Colombeia : Generalissimo Francisco de Miranda’s Archives]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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